[열다섯 번째 마시다] 추억이 가득 담긴, Früh Kölsch (프뤼 쾰쉬, 4.8%)

지금의 나(대단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독일, 특히 깡촌을 사랑하는 변태)를 있게한건

역시 교환학생 시절이 분명하다.

 

외국생활에 대한 그렇게 큰 열정까지는 없던 내가 아주 훌륭하신 대학 지도교수님을 만나

그분의 제안으로 교환학생을 떠나 독일에 살다온 잠깐의 시간들이 

2025년의 나를 뮌헨으로 이끈거다.

뚜껑만 봐도 가슴 한켠이 훈훈해지는 나의 쾰시

 

그 시절의 기억들이 내게 각별한건 너무 당연한데,

그런 맥락에서 어느날 장보러간 마트 맥주 진열대에서 쾰시를 마주쳤을때의 그 기분이란...

 

서툴지만 낭만 가득하고,

처음맞는 독일 겨울의 냉소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따사로운 라인강의 햇살을 닮은

그 무수한 추억과 기억들이 내게 쏟아져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그 무렵엔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파악도 미처 덜 끝나있었고,

그래서 다양하고 순수한 기억들이 많이 만들어졌던것 같다.

---

쾰시(쾰쉬, 쾰슈 뭐가됐든)에 대한 리뷰를 하려고 사진첩을 뒤져보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즐기는 소소한 일상의 재미에 관한 사진을 찾아서 공유해볼까 한다.

 

장보러가는건 독일 생활에서의 중요한 일상이다.

일단 외식물가가 워낙 비싸다보니 한국에 살때보다 집에서 해먹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기도 하고,

한국과 달리 가게들이 문을 닫는 일요일 공휴일을 피해 미리 식재료를 조달해야하는 까닭에

항상 '내가 장을 언제 보러가야 하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살아가는것같다.

 

한 주에 마트를 몇 번 가는지 생각해보니 보통 네 번정도 되는것같다.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고역이겠지만, 나는 마트에 장보러가는게 제법 즐겁다.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질서정연하게 선반에 잘 늘어서있는걸 보면 꿈꾸는 기분마저 들 때가 있으니깐.

 

독일에는 심지어 마트 선택지도 많은데 마트마다 성격도 묘하게 다르다.

물론 제일 그리운건 곳곳에 있는 24시 편의점이지만...

 

EDEKA, REWE, ALDI, LIDL, PENNY, NETTO, NORMA... 

집 근처에도 다 고만고만한 거리에 이 모든 마트들이 다 있는지라 매번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해야하는데

보통은 먼저 각 마트별로 발행하는 전단지를 모아둔 어플을 키고 특가상품을 좍 훑는다.

(여러가지 어플이 있는데, 나는 kaufDA 라는 어플을 쓰고있다)

그거에 따라서 식단을 구상하고는 마트로 출발하는것 :D

 

이게 바로 자린고비의 삶이다. 한 주 식단이 세일상품에 따라 정해진다니...

특별히 유혹적인 마트가 없을때 내가 곧잘 가는 마트는 REWE인데(요즘은 사실 별로...)

REWE가 진행하는 로열티 프로그램 때문이다.

 

어릴때 동네 큰 슈퍼에 가서 엄마 심부름을 해오면 가격에 따라 스티커를 몇 개씩 쥐어줬다.

집에 오면 쪼르르 주방으로 가 의자를 놓고 찬장에 뉘여있는 종이 한 장을 꺼냈는데,

그 종이에는 1부터 보통 50에서 100까지 숫자가 쓰인 동그라미들이 있었다.

 

그걸 특정 갯수 이상을 채워서 주방용품이라던가 하는 것들로 바꿔오던 그 소소한 목표의식을

요즘 한국을 살아가는 학생들은 더이상 공유하지 못하겠지만, 독일 REWE엔 아직 이게 남아있다!

독일 마트 브랜드 REWE가 진행했던 로열티프로그램

 

지난 하반기에는 식기를 만드는 로젠탈(Rosenthal) 그룹 하위브랜드 토마스(Thomas)와 제휴였는데

마침 내가 집을 구하고 식기류를 필요로하던 시즌이었던지라 나름 신경써서 모았었다.

 

5유로마다 쿠폰 1매를 주는데 막상 독일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에 큰 관심이 없는지

(계산하면서 이 쿠폰 달라는 사람을 몇달동안 딱 한 명 봤다)

계산대 점원에게 스티커 모으고싶다고 하면 2개만 줄 구매액에도 한줄(10개 이상)씩 끊어주곤 했다.

 

그렇게 지금 우리집에는 밥이나 국그릇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씨리얼보울 4개와

튀김요리를 올리면 예쁜 평평한 접시 2개, (왜 손잡이를 안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머그 2개가 있다.

엄청 뿌듯한 기분으로 찍었던 사진

 

사실 스티커를 다 모은들 그냥 받는게 아니라 (정가 기준으로) 싼 가격에 구매할 권리를 주는거라

아마존에서 더 싼것도 찾을 수 있다마는 아주 견고하게 잘 만들어진 독일제 그릇에 만족하며 쓰고있다.

 

내가 하잘 쾰시랑 관련없는 이 이야기를 주절주절 맥주리뷰 포스팅에 쓰는 까닭은

뮌헨에 와서 처음으로 쾰시를 마신 날이 내 첫 씨리얼보울을 교환해온 날이었기 때문이다 :D

저 뿌듯한 기분을 무시하고싶지 않았다 ㅋㅋㅋ 

너무나 독일스러운 저녁풍경

 

오죽 기분이 좋았으면 지극히 평범하고 독일스러운 안개낀 저녁 풍경이 예쁘게 느껴졌을까...

장봐서 돌아오는 길 풍경 사진을 몇 장이고 남겨뒀다 ㅋㅋㅋ 

그것도 웃겨서 함께 일기삼아 남겨두기로 했다.

 

쾰시에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덧입혀졌다.

---

날씬한 저 병... 맛과 별개로 나는 쾰시가 그냥 좋다

 

쾰시의 역사는 여기 바이에른 맥주들에 비하면 갓 태어난 수준이다.

여러 쾰시 브랜드들 중에서 나름 빠른 편에 속하는 Früh 쾰시가 1904년생이니 

막 Seit(Since의 독일어) 1300년대를 달고있는 바이리쉬 비어들에 비할 바가 못된다...

 

사실 쾰른 사람들도 옛날부터 무수한 양조장을 가지고 자기들의 맥주를 마셔왔지만 

지금은 거의 이 쾰시에 빠져 허우적대며 산다고 봐도 무방하다.

 

쾰시의 탄생은 Hell 맥주의 태동과 아주 밀접하게 묶여있다.

[여섯 번째 마시다] Schneider's Helles

 

지난 글에서도 썼지만 원래 전통적인 맥주의 발효방식은 '상면발효' 라는 방법이다.

흔히 아는 에일맥주들이 채택하고있는 옛 방식으로 상온정도에서 발효하는 와중에

효모들이 거품을물고 위로 떠오르기 때문에 상면발효법이라고 한다(Obergärig).

흔히 생각하는 발효의 그림이다.

 

1874년 독일의 Carl von Linde 라는 사람이 독일 최초의 냉장기계를 만들었다.

이게 맥주업계에 의미하는바가 상당했는데 저온에서의 장기숙성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라거효모를 넣고 한 10도 언저리의 차가운 곳에 저장시킨채로 2주가량을 숙성시키면

(에일은 3일이 표준인지라 라거-Larger-라는 표현도 여기서 나왔다. 저장해두는 맥주였던거다)

에일에서는 만나뵙기 어려웠던 엄청난 청량감을 자랑하는 Hell 맥주가 맹글어진다.

 

사람들은 이 청량감에 열광했고 Helles가 점점 더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효모

 

그런데 Helles에는 제법 큰 흠결이 하나 있다.

헬 맥주, 그러니깐 라거비어는 청량감을 위해 향을 거진 다 희생시키게 된다.

에일효모와 달리 라거효모가 보리맥아속의 당분을 엄청나게 먹어치워버리기 때문이다.

 

향을 사랑하는(오드코오롱, 4711이 쾰른거다) 우리 쾰른 사람들은 청량함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보다.

이 양반들은 그래서 일단 상면발효 시켜 향을 입힌 다음에 추가적으로 저온 라거링을 해버린다.

참 단순한 방법인데 그게 결과가 다행이 괜찮았는지 아직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있는 쾰시.

 

그래도 쾰시에 대한 정의는 제법 엄격하게 되어있는데,

밝은 빛깔의(hell), 효모가 체에 걸러진(blank), 상면발효(obergärig)의 맥주로

쾰른과 쾰른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되어있다.

 

무려 이 내용이 '쾰시 협약'이라는 걸 통해서 규정되어있다...

 

객관적으로 맛 자체가 아주 특별하게 걸출한 맥주는 아니라는점을 나도 인정하긴 한다.

향과 청량감 모두를 어느정도 살려내기는 했는데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 두 요소 모두가 어중간하게 살아있다고 느껴지는것도 사실이다 ㅎㅎ

쾰시 전용잔, Stange

 

오래지 않은 역사의 쾰시지만 마시는 모양새는 그 어느 도시보다도 독특하다 :D

위의 잔은 쾰시 전용잔 Stange(슈탕에)라고 한다.

총 200ml가 들어가는 저 길쭉한 잔은 길쭉한 모양 때문인지 막대기(Stange)라고 불린다.

그나마도 200ml중에 50ml는 거품으로 채우는게 공식적인 서빙 방법.

 

이 자그마하고 가벼운 잔 덕분에 볼 수 있는 쾰른 비어가르텐의 독특한 풍경이 또 있다.

대성당앞 맥주집에 가면 Köbes라고 불리는 웨이터들이 Kranz(화관이라는 뜻)에 맥주를 꽂아다닌다.

이건 가정용 크란츠

이건 쾨베스용

 

150ml는 맥주를 즐겨 마시는 입장에서 딱 한 모금거리다.

대체 쾰른사람들은 한 모금이면 취기가 올라버리는 알콜 X레기들인걸까? 

 

음... 교환학생시절 독일인 버디가 나를 데리고 가장먼저 한 일이 있다.

쾰시 파는 맥주집에 가서 중요한 '룰'을 알려줬다.

 

"맥주를 그만 먹고싶으면 코스터에 잔을 올려놓을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쾨베스(웨이터)들은 잔이 비기가 무섭게 자기의 크란츠에서 맥주 한 잔을 꺼내준다.

그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맥주가 필요한지 물어보거나 맥주를 달라고 주문하는 일은 없다.

 

그런고로 이동네 사람들은 맥주의 모든 모금 모금마다

자신들이 기어이 만들어내고야만 청량-탄산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마시려는 변태들인거다.

 

역시 NRW를 조속히 방문해야겠다...

 

끝.

 

아, 그러고보니 이 맥주가 가진 또 하나의 변태성은

맥주순수령을 준수하고있다는거다...

---

도수 : 4.8%

용량 : 330ml 

용기 : 병

원료 : 물, 보리맥아, 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