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번째 산책②] 비텔스바흐가 사랑한 뮌헨의 주산 Herzogstand

[스물다섯번째 산책①]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한 풍경의 봉우리들을 향해

다시 마르틴스코프에서 이어가보자

 

장엄한 풍경이 잠시 앗어갔었던 숨을 되찾아온건 허기였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Herzogstand까지 올라간 뒤에 아직 남아있는 비상식량을 꺼내먹으려했지만

그냥 여기에서 먹어도 딱히 아쉬움이 남을것같지는 않아서 주섬주섬 배낭을 열었다.

 

보통 등산중에 점심(바나나, 계란, 초콜릿, 따뜻한 차)은 정상에 쪼그려앉아 먹는데,

정상부근의 경치가 으레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다.

기왕 앉아서 해결해야할 끼니 더 멋진 풍경과 함께가 더 좋지 않겠나 :D

 

아직 목적지가 남았음에도 허기의 외침에 살짝 넘어가준건

더 위쪽에 행여나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후회가 없을것같아서였다.

 

자리만 조금 더 넓었더라면 비텔스바흐 왕가에서도 지나쳐온 산장 자리가 아니라

여기에 오두막을 짓고싶었을거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만큼 마르틴스코프는 황홀하다.

매끈한 계란, 잘도 삶아졌다

 

훌륭했던 식사를 모두 마치고, 경치가 주는 먹먹함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난 후에

드디어 앞으로만 줄곧 향해있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기로 했다.

Heimgartenhütte 가는 길, 날카로워보이는 저 능선이 등산로다

 

오른쪽, 그러니깐 서쪽에는 Herzogstand보다 살짝 더 높은 봉우리 Heimgartenhütte가 있다.

저 봉우리 자체가 꼭 오르고싶지는 않지만 저기로 가는 등산로를 꼭 한번 타보고싶다.

서슬퍼런 칼날처럼 솟아있는 능선을 따라 나있는 저 길은 마음의 준비 혹은 동료가 더 필요할것같다.

저기는 정말 목적지가 맞다

 

뒤로 돌아 몇 걸음을 옮기니 반대편 봉우리, 그러니깐 오늘의 진짜 목적지 Herzogstand가 보였다.

워우, 지그재그 길이 난 곳이 아주 뚜렷하게 보이는데 짧은 길은 아닌것같았다.

 

거의 끝이라고 생각해고있던 찰나에 이렇게 늘어져있는 길을 바라보니 숨이 살짝 막혀온다.

나는 좀 더 가팔라도 질러가는 등산로가 좋은데 ㅠㅠ

케이블카를 타야하는 연로하시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도 조금 고생스러워도 정상을 밟을 수 있기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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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보다보니 삼척에 있던 스위치백 철도가 생각났다.

어릴때 내가 기차를 하도 좋아하니 부모님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독특한 구간을 찾아가주셨었다.

그곳과 닮았다고 생각하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첫 굽이를 돌면서 마음속으로 '하나' 를 셌다.

그리고 다음 굽이를 돌면서 '둘' 하고 숫자를 올렸다.

내가 몇 번을 꺾어서 정상까지 가는지 세어보고 내려올때는 하나씩 지우면서 와야지 싶었다.

어느정도 올라왔을 무렵 건너다보는 마르틴스코프

 

그리고 주변을 둘러볼때마다 세던 숫자를 까먹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눈에 툭 툭 들어오는 거대한 풍경이란게 생각을 앗아가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위에 올랐을때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내보여준 마르틴스코프는 

건너편 언덕을 오르며 다시 되돌아보았을때는 자기 자신마저 그 풍경에 녹아버려 경이로움을 더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또 다른 느낌으로...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 전면에서 그 화폭의 주인공을 자처하던 마르틴스코프는 

어느덧 조금씩 낮아지고 더 작아지더니 뒷에 누워있는 산들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다시 나타난 Walchensee

 

물론 아름다움은 그 방향에만 있지는 않다.

시야가 트인 곳이라면 어디든 자연이 빚어낸 황홀경이 소리없이 널려있다.

정상같지만 아니다

 

결국 지금에 와서는 몇 번째 코너를 돌아 이 십자가를 마주했는지는 잊었지만(한 여덟번...?)

정상을 의미하는 십자가가 서있었음에도 여기는 진짜 Herzogstand가 아니었다.

Herzogstand Gipfel... 그런게 과연 꼭 필요했을까...? 

멀리서 십자가를 보고 설레었던 나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른 한쪽에

더 높은 봉우리가 버티고 서있다는 사실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피로가 슬슬 쌓이기 시작할 시점인지라, 의도했을리는 없는 이런 트릭에도 야속함이 샘솟는다.

딱 이 만큼만 더 가자...

 

살짝 속은것같은 기분을 뒤로하고 다시 힘을내 정상으로 향한다.

다행이 보기보다는 가까워서 순식간에 언덕을 올라냈다.

마르틴스코프 산정에는 작은 정자같은게 하나 있다

 

야호,(를 외치지는 않았다 :D) 드디어 정상이다!!!

잔잔한 뿌듯함이 찾아왔다. 

날씨마저 차분해서 산을 타고넘는 바람조차도 오늘은 조용하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산정에 있는 정자 한켠에 자리를 잡고 쉬고있었고 나도 그 사이 어디즈음 앉았다.

여기 정자는 사실 정자로 지어진 구조물은 아니지만 지금은 훌륭한 쉼터가 되어준다.

 

1920년대에 바이에른의 몇몇 과학자들이 새로운 통신수단을 실험하려고 

여기에 안테나 장비를 설치하고 산 아래까지 케이블을 드리웠다고 한다.

이 정자는 그 당시 실험자들을 위한 관측소 정도였던것같다.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소중한 그늘을 드리워줬다는 면에서 충분히 가치있는 행위였다.

 

다시 주변을 둘러볼 차례다.

북쪽으로는 호수들이 즐비하다

 

절벽에 가까운 북쪽을 내려다보면 군데군데 파아란 호수들이 톡톡 박혀있다.

왼쪽부터 무르나우(Murnau) 마을 옆에 Riegsee,

가운데 가장 멀리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Starnbergersee

바로 앞쪽으로는 역시 이 산이 품고있는 Kochelsee, 사진에는 없지만 Staffelsee 까지도 보인다.

 

그 커다란 슈타른베르크 호수가 콩알만하게 보인다.

거기서 살짝 오른쪽에 분명히 뮌헨도 있을테지만 카메라도 내 눈도 그만큼 잡아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뮌헨에서는 이 산이 또렷하게 보이는게 산이라는게 참 거대하긴 한것같다. 

Heimgartenhütte 가는길, 등산로가 좀 더 잘 보인다

 

서쪽엔 여전히 하임가르텐으로 가는 능선이 보이는데 가까이 온만큼 등산로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살벌하다 ㅠㅠ

Walchensee 수력발전소

 

동쪽으로는 발셴제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잘 보면 신기하게도 산 중턱에 있다.

한국지리시간에 언젠가 배웠던것 같은 유역변경식 발전이다.

해발고도가 800m인 Walchen 호수의 물을 산을 관통해 뚫은 터널을 통해 반대편으로 흘려보내고

600m 고도에 자리한 Kochel 호수에 쏟아버리면서 발전을 하는것. 

 

인간의 상상력은 참 대단한것같다...

다시 한 번 남쪽

남서쪽으로 마지막

 

이제 남은 식량도 딱히 없어서 오래지않아 땀이 얼추 식어갈무렵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 항상 '다시 내려올거 뭐하러 올라가는데?' 하고 물어본 친구녀석의 물음이 생각난다.

 

그러게나말이다...

어디로갈까

 

하산시간은 올라올때보다 항상 짧게 책정되어있는데 신기하게도 대체로 맞다.

나도 보통의 사람에 해당되긴 하나보다 :D

 

내가 내려갈 루트는 세 시간짜리, Herzogstandbahn 승강장으로 갈거다.

다만, 위 승강장이 아니라 산 아래 승강장이라는거 뿐이지.

하임가르텐휘테를 거쳐서 발셴제로 내려가는게 4시간 15분이면 큰 차이가 안난다는 생각에 흔들렸는데

그거야말로 다음을 위해 남겨두면 내가 다시 이곳을 찾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은 산장으로 다시 내려가야한다.

산장에는 무료 화장실도 있으니 이래저래 정말 중요한 곳!

케이블카 타러가는 외길

 

그리고 산장에서 바로 하산을 할까 싶었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케이블카 승강장을 가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케이블카 편도 요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타고 내려갈까 하는 불순한(?) 마음과

이쪽 구석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지 하는 궁금증에서다.

적어도 한 개의 이유는 맞았다

물론 후자다

 

적어도 한 개의 궁금증은 정답이었다.

물론 후자였지만 :D

 

딱히 기대하지는 않은채 속는셈 치고 왕복 30분을 투자해 다녀온 케이블카 승강장에서는

의외로 멋들어진 경치가 있었다.

Walchensee 마을이 조금 더 가까이 보이는게 매력포인트였던것 같다.

 

케이블카 가격도 사실 나쁘지는 않았던게 왕복 21유로에 편도 12유로면 지불할만하긴 하다.

그래도 오늘의 등산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커서 역시 걸어서 하산하기로 했다.

(애초에 답이 정해져있었으면 왜 궁금해했나)

여기에서도 루트비히 2세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는길에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바이에른 곳곳에서 만나뵙게되는 루트비히 2세(이양반 할아버지도 만만치않다)였는데

여기에 처음으로 산장을 지은 이 분 사후 100주년인 1986년에 코헬 사람들이 해둔 동상이었다.

 

등산와서까지 보게될줄이야...

산장앞 한구석에 숨겨진 나에게 필요한 이정표

 

산장 한켠에는 아까 위에서 만나본 세갈래길 이정표 말고도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숨어있다. 

나는 이 길로 산을 내려갈건데 시작부터 길이 대놓고 가파르다.

보기엔 이래보여도 그냥 냅다 내리꽂는 길이다

 

위 사진이 거의 초반부인데, 보기에는 완만해보여도 체감상 거의 그냥 냅다 밑으로 내리꼽는 느낌이다.

애시당초에 Herzogstand 자체가 상당히 뾰족한 편이라 경사가 거의 45도인게 사진에서도 보인다.

 

나는 이 길을 한 30여분동안 뛰어내려갔다.

내려가기 직전 행여나 하는 마음에 버스 시간표를 찾아봤는데 

Kochel역으로 돌아가는 9608이 내 예정 하산시간보다 20분 전에 떠난다고했다.

그리고 그 다음 버스는 1시간 40분 후... 뛰는게 아무래도 나은 선택지 같았다 :D

 

시간표를 일찍 찾아봤으면 아마도 케이블카 승강장은 안다녀왔겠지...?

 

내가 생각보다 산에서도 잘 뛰어다닌다는걸 깨달았다.

세곳 다 각기 다른 지점이다

 

길이 잔도처럼 좁아져서 약간 무서움이 생기고,

또 어느정도 시간을 좁혔다는 생각이 들었을때서야 비로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얼추 느꼈지만 가을녘의 빛바랜 풀 위로 저녁놀이 내려앉아서 온 세상이 황금빛을 입고있었다.

 

정말이지 걸을 맛이 나는 하산길이다.

거의 땅으로 돌아왔을무렵 숲은 다시 울창해진다

 

사람사는 세상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숲이 울창해지는게 느껴졌다.

이 즈음이 되니 날이 제법 어둑해져서 이제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이었던것같다.

그 험한 산길을 뛰어내려오는동안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버린 내 등산화 밑창이 터져버린게.

지나가는 독일사람들마다 내 신발이 뭔가 이상함을 알아채고는 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저도 알고있습니다 ㅠㅠ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인류의 역작 록타이트 순간접착제를 주문했다)

호수에서는 이미 햇볕이 퇴근한지 오래

점점 그늘이 산 높은곳까지 점거해나가는 중이다

 

호숫가의 성 마가렛 예배당이 점점 커져가는걸 바라보면서 하산이 마무리되었다.

정말 다행이도 오늘도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막판에 발 뒤쪽에서 신발 밑창이 거의 절룩거리다시피 덜렁거리긴 했지만 :D

 

사실 그건 하산중에보다 오히려 뮌헨에 돌아와서 더 나를 힘들게했다.

시선을 너무 많이 끄는나머지 부끄러움이 쉴새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산로 끝, 그러니깐 등산로 입구에 설치되어있던 안내판

 

산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등산 안내판을 발견했다.

오늘 어떤 길을 걸었는지 되짚어보자면 오른쪽 끝 파란 6번 동그라미에서 시작해서

Marinskopf를 찍고 다시 Herzogstand를 정복한 후에 H2 루트를 따라 총총 뛰어 내려왔다.

 

산행을 마치고 나서 지도를 보는것도 뿌듯함이 있다.

색조가 모두 빠져나간 호수

 

너무 뛰어내려왔던지 버스 시간까지 오히려 시간이 제법 남아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에너지가 남았던건지 호숫가를 살짝 산책했었는데

해질녘 색조가 거의 빠져버린 호수도 은은하니 차분해서 좋았던것같다.

 

물론 10월말 초저녁에 땀이 식고있다보니 조금 쌀쌀한건 어쩔 수 없었다.

Kochel역에서 일몰을 맞았다

 

Kochel역에 왔을때는 세상이 다시 검은색을 입고 두 줄 선로만이 저녁놀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열차 자리에 몸을 구겨넣고선 잠깐 꿀같은 잠을 자고 난 나는

전날 뮌헨사람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선풍기 무료나눔을 예약해둔터라(이 가을날에 여름을 대비한다)

집으로 가지 못하고 집과는 뮌헨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정 반대편 교외를 거쳐 귀가했다.

 

물론 이때도 신발 밑창은 신명나게 덜렁거렸다 :D

 

Herzogstand 산행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