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번째 산책①]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한 풍경의 봉우리들을 향해

작년의 마지막 산행은 10월이 거의 끝나기 직전이었다.

예상치 못한 마지막은 아니었고, 오히려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산행이라고 마음을 먹고 떠났었다.

겨울산은 나 따위가 우습게 볼만한 영역은 아니라서 설산타는 즐거움은 아예 포기해버린지 오래다.

 

그리고 11월부터는 이제 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겨울이 맞다.

특히 알프스같은 산 안에서는.

[열일곱 번째 산책] 쉽게 즐기는 알프스, 바움가르텐슈나이트 산행

 

고르고 고르다가 정해진 목적지는 Herzogstand(헤어쪽슈탄트),

한국어 표기로 옮기려니 조금 이상하지만 독일어를 이해한다면 뭔가 특별함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Herzog은 신성로마제국의 공작지위인데다가 Stand는 서있는곳, 장소, 입지라는 뜻이니

공작이 서있는 곳이라는 말이 된다. 

 

뮌헨에서 열차 한 번과 버스 한 번, 한 시간 반만 달리면 등산을 시작할 수 있는 이 가까운 산은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중 하나이기에 옛날부터 뮌헨의 주산으로 대접받았고,

지금도 가장 사랑받는 유명한 산들중 하나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간다길래 날씨 좋은 평일만 손꼽아 기다리다가(10월에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드디어 출발신호가 떨어졌다 :D

오늘도 Werdenfelsbahn과 함께

 

Herzogstand는 뮌헨 남쪽 Kochelsee(코헬호수)와 Walchensee(발셴호수) 사이에 우뚝 솟아있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열차를 타고 Kochel까지 가서 버스를 탈거다.

그리고 코헬로 가는 노선은 Werdenfelsbahn에서 운영하고 있다. 

Werdenfelsbahn 열차 테이블마다 그려진 노선도

 

RE6이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을 갈때 꽁무니에 열차 한 대를 더 달고가다가 툿징을 지나면서 떼어버리는데

오늘 가는 코헬은 바로 떨어져나가는 그 지선 RB66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도 이번 산행 덕분에 처음으로 지나가보는 구간인데 고요한 시골을 따라 가는 단선전철이다.

코헬에 가까워질 무렵

산이 제법 가파르다

 

차창밖 풍경은 아무래도 가르미슈로 가는 RE6 본선보다는 훨씬 온화하다.

뮌헨에 살다보면 가르미슈 뒷산 추크슈피체가 독일 최고봉이라는걸 자주 잊는다.

날씨 좋은날 집앞 들판에 나가서면 (좀 멀리이긴 하지만) 보이는 뒷산이라 그런건가 ㅎㅎ

 

그러고보면 오늘 가는 Herzogstand도 뮌헨에서 바라다보이는 능선중 하나다.

Kochel 역은 흔치않게 선로를 가로지르게 해준다

 

코헬 역에 도착했다.

종점이라 그런가 승강장에서 역 출구로 나가는 길이 선로를 가로지르게 나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도이치반은 선로를 가르지르는걸 아주 강하게 금지한다.

간혹 열차를 기다리다가 '미승인자의 선로 침입' 사유로 연착알림이 나오면 최소 30분은 운행이 중단되는데

대개 이건 지하로 내려갔다 올라오기 귀찮았던 누군가가 선로를 가르지르다가 생기는 해프닝이다.

기본 프로토콜이 30분정도 걸린다고 했다...

Kochel 역 간판도 하나 남기고

역 바로 앞에 대기중이던 9608번 버스

 

내가 타야하는 9608번 버스는 항상 열차 도착시간에 맞춰서 역 앞에서 바로 기다리고 있다.

너무 편하고 고맙지마는 호숫가 마을 한켠 구경할 시간정도는 줬어도 좋았을텐데 싶다.

Kesselberg Paßhöhe 정류장

 

아니, 배부른소리였다.

9608 버스는 어떤 종류의 불만도 들을 필요가 없는 착한 녀석인게

이 노선 덕분에 150m정도 높이는 힘 하나를 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

버스는 나 대신 두 호수 사이에 난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가다가 어느순간 멈춰선다.

이 길 자체에도 역사가 깃들어있다

 

나야 뭐 등산로가 있다는 곳에 내리기는 했지만 너무 길 한중간이라 약간 당황스러웠다.

다른 서너명이 같이 내리지 않았더라면 혼자는 의심스러워서 못내렸을것도 같다...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니 Kesselberg라는 이 길의 연혁이 간단히 새겨진 동판이 있었다.

여기가 바이에른 공국을 통일한 현명공 알브레히트가 1492년에 처음 놓은 길이란다.

당연히 그 당시의 길과 지금 길이 같을수는 없고, 

지금 길의 기틀은 1800년대 후반 그 유명한 루이트폴트 바이에른 왕자가 닦았다고 되어있다.

 

땡큐, 덕분에 편하게 시작합니다!

Walchensee 모습

 

길 한쪽에 나있는 조그만 등산로 입구에 접어든지 얼마 되지 않아 왼쪽으로 발헨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호수와 그 뒤의 산세는 정말 아름다운데,

바로 앞을 지나가는 송전선 때문에 마치 훌륭한 풍경화에 칼자국이 나버린것 같은 느낌이다.

 

Herzogstand를 오르는 루트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편한 방법은 훌륭하게도 케이블카인데, Walchensee 마을 외곽에서 탈 수 있다.

그리고 케이블카 승강장 바로 지척에서 시작하는 아주 가파른 등산로가 하나 있는데

등산로중에서는 최단거리이지만 경사가 조금... 심란하기도 하고,

호수를 등지고 올라가는 등산보다는 호수를 바라보며 하산하는게 더 좋을것같아서 하산루트로 정해두었다.

 

나머지 하나는 Urfeld라는 마을에서 시작하는 등산로인데 큰 메리트는 없다.

9608을 타고 Kasselberg 정류장보다 한 번 더 가면 내려주는 호숫가 마을이 우어펠트,

애써 버스가 올려다준 높이를 내팽겨치고 호숫가에서 시작할 필요까지는 없을것같았다.

 

Urfeld에서 시작하나 Kasselberg에서 시작하나 등산 초입부는 정말이지 단조롭고 심심하다.

처음에는 발헨제가 조금이나마 보이더니 그마저도 곧 숲에 가려지고 마는데, 

그때부터 한 시간 정도는 양옆에 아무 풍경도 없이 숲을 따라 터벅터벅 걷기만 하게된다.

간혹 내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다. 

조금 무미건조한 등산로, 그 앞으로 목적지가 보인다

 

아, 처음으로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는 광경이 나오긴 하는데

갑자기 안그래도 키큰 나무들 위로 등장하는 엄청 높은 봉우리, 오늘의 목적지이다 ㅠㅠ

Herzogstand의 해발고도는 1732m, 절대 낮은 산은 아니다...

참 심심한 등산로

 

쭉 서쪽으로만 향하던 등산로가 드디어 남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경사가 조금씩 더 심해졌다.

이제 좀 산행이 재밌어지려나보다 싶어서 마음이 후련해진다 ㅎㅎ 

사람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이 얼마나 중요한데!

호숫가의 Kochel 마을

 

역시 바로 시야가 트이더니 기차를 내렸던 호숫가 마을 Kochel의 모습이 보였다.

이 만큼 작아졌구나,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오늘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삶은계란

 

갈길이 먼 만큼 에너지를 보충하는게 중요하기도 하고,

북쪽사면을 걷는 내내 그늘을 걷다가 모처럼 만난 햇살이 반갑기도 해서 

겸사겸사 아침에 부지런히 삶아온 계란 한 알을 까먹었다.

등산다닐때마다 계란을 삶아다니니 사람들이 계란을 참 좋아하나보다 하겠다마는

사실 평소에는 퍽퍽한 노른자 식감을 그렇게 즐기지는 않는탓에 거의 먹지 않는 음식이다.

 

그래도 이만한 에너지원도 없는데다가 산에서는 뭘 먹어도 맛있어서 등산날 새벽에는 꼭 계란을 삶는다.

반응형

줌을 땡기니 목적지중 한 곳이 살짝 보인다

 

다시 걷기 시작해 앞을 올려다봤을때는 슬슬 봉우리에 높인 십자가들이 제법 큼직해져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굽이를 더 돌고 나니 드디어 알프스답게 산허리에 초지대가 나타났다.

정상을 조금 못갈때 초지대가 한 번 나온다

 

 

모처럼 만난 완만한 경사에 잠시 쉬어가는 느낌으로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며 걷는다.

뒤로는 코헬제가 조금 더 작아진채로 다시 나타났다. 

건너편 봉우리도 이제 얼추 눈높이에 걸친게 열심히 올라오긴 했지 싶다.

 

등산로가 무미건조하다보니 사진이 없어서 그렇지 거진 두 시간 반 이상을 가파른 경사를 따라 걸어온 나다.

다시 만난 코헬제, 건넛산이 눈높이 아래에 놓였다

 

이 완만한 길 바로 옆, 내 관자놀이 바로 윗쪽으로 내가 가야할 목적지들이 버티고 서있는데,

바윗덩어리 사이에 길을 내기엔 너무 가파랐는지 

길은 완만한 산등성이를 따라 한참을 반대방향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다시금 길이 정상으로 향한다.

이렇게 완만하게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능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와야한다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 무렵 찾아온 길다란 우회구간에 조바심이 살짝 나려다가

언덕배기를 따라 걸어올라가는 도중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속에서 모든 잡념이 사라졌다.

생각을 비우고 걷다보면 앞에 놓인 가야할 길도, 흘려보내는 시간도 어느새 금방 줄어들어있다.

언덕배기를 거의 다 돌아올라왔을때, 아까 지나온 오두막이 작게 보인다

 

그럼에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조바심과 함께 '드디어' 라는 심경으로 길이 꺾이는 지점을 통과하면

Herzogstandhaus 라는 산장이 보인다. 

Herzogstandhaus, 끝이 아니다

 

지어진지 30년이 살짝 지난 이 산장은 사실 화재로 불타버린 옛 건물을 대신해서 지어진건데,

불타 없어진 그 건물을 지으라고 명한 사람은 다름아닌 루트비히 2세였다.

동화같은 성들(노이슈반슈타인, 헤른킴제, 린더호프)을 지은 그의 눈에 여기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사실 그보다 10여년 더 전부터 이미 비텔스바흐 왕가의 사냥별장이 있었다고는 한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이 산을 무척이나 각별히 여겼던것같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정상들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숨이 멎도록 아름답기도 하고,

아마 뮌헨에서 가장 가까이에 서있는 산인 점에서도 마음이 더 쓰였을거다.

 

이 산이 Herzogstand로 불린게 바이에른 공국시절인 1535년 부터라고 하니 그 사랑의 나이만도 벌써 500살이다.

Herzogstandhaus 산장에서

 

등산로를 오르면서 마주친 사람이 손에 꼽게 적었다는 사실이 무색히도

산장 앞에는 평일인게 믿기지 않을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아마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여행객들이었을거다.

 

산장 앞 노란 표지판에는 세 방향의 이정표가 달려있었는데(사실 네 갈래길인데 다른 표지판은 숨어있다)

내가 지금껏 올라온길(하행 2시간 15분), 케이블카 승강장 그리고 정상으로 가는 길 이렇게다.

어우... 정상까지 여기서부터 45분이라니, 여기 산장은 결코 끝이 아니다.

게다가 고도차도 160m나 난다 ㅠㅠ

 

쉬어갈법도 하련마는 너무 인파속에서 쉬어봐야 얼마나 쉬겠냐 싶어서 정상까지 쉼없이 가기로 했다.

내가 디뎌온 길과 그 너머가 함께 내려다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면 호수가 빼꼼 나타난다

 

금새 그러길 잘했지 싶어졌다.

눈 앞을 가득 매운 아름다움에 힘듦이 잊혀진다.

게다가 풍경이라는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마다 새롭게 달라지는터라 멈추고 싶지도 않다.

 

새로 오르는 능선 아래로 내가 디뎌온 길과 그 너머에 펼쳐진 초원이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내자 산허리 뒤에 숨어있던 발셴호수도 빼꼼 고개를 디밀었다.

 

정상에 가다 말고 약간 고민에 빠졌었다.

예상치못하게 왼편으로 Martinskopf(마르틴의머리) 라는 봉우리 가는 길이 나온거다.

편도 20분 짧은 길이라고는 하지만 왕복으로 계산하면 이래저래 한 시간정도는 산행이 길어지기때문에

제법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마르틴스코프 가는길, 정말 좁다란 외길이다

 

저 봉우리 정상부에서 혹시라도 Herzogstand로 가는 길이 따로 나있으려나 싶어 이래저래 찾아봤지만

암만 봐도 다시 이 길을 통해 돌아와야만 하는 외길인듯 했다.

 

후... 여기 산에 다시 온다는 확신하나 전혀 없는게 인생인데

온김에 들러보지 뭘 또 남겨두고 가나 싶어 숨 한 번만 딱 몰아내쉬고 출발하는 산책자.

 

다행이 올라갈때의 20분은 금방이었다.

관목이 우거진 돌비탈을 지그재그로 몇 번 올라가다 보니 마르틴스코프의 십자가가 보였다.

(그나저나 어떤 마르틴을 얘기하는거지 여기는?)

마르틴스코프 완등

 

그리고 꼭대기에 올라 지금까지 바라보고 올라오던 땅이 시선 밑으로 사라진 순간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아니, 이런 장엄한 풍경에 바칠 찬사가 고작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니 격에 맞지 않지.

어줍잖게 내 부족한 언어로 표현하기보다는 사진 몇 장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두 눈에 담기던 감동에는 사진과 영상 역시 비할바가 못되지마는...

마르틴스코프에서

Martinskopf에 앉아 둘러보는 Walchensee 방향 풍경

 

이 장엄한 풍경을 구성하는건 주로 Walchensee다. 

그리고 산들이 살짝 평지에 자리를 내어주는 오른쪽 뒷편의 소실점은 Mittenwald 마을이다.

멀리서 봐도 아름다운게 참 신기한 마을이다.

 

그러고보니 미텐발트에 가이스터클람도 다시 가고싶은데, 

지난겨울 악천후에 손상이 좀 심하게 갔는지 아직까지도 보수공사중인것같다.

독일이니만큼 올해 안에는 다시 못갈거라고 생각해야 맞겠지?

[열아홉 번째 산책] 말 그대로의 '숲속마을' 미텐발트와 가이스트 협곡②

 

[열아홉 번째 산책] 말 그대로의 '숲속마을' 미텐발트와 가이스트협곡①

 

그냥 지나치지 않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정도만 남겨두고서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비워본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며 쉬다가 불현듯 '고요하다' 라는 생각이 찾아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대개 비슷하다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잊고 오로지 정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숨이 멎을듯한 아름다움' 이라는 그 표현이 상상에서 나온것만은 아니었나보다.

 

그 고요와 평온 안에서 모두가 함께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