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다면, 그는 즐거운 자 일것임에

최근들어 그간 쯔비셴 들어있던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거처를 다시 한 번 옮겼다.

비록 남의 집이었지만 짧지않은 시간동안 은근히 정이들었던지 

가끔씩은 모르는척 그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버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지금 내가 그 집 문을 두드리면 원래의 집주인은 상당히 곤란할테니

기억속에서라도 그곳을 거닐며 아쉬운 마음을 조금 달래볼까 한다.

어쩌면 날씨가 좋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서였을지도

 

뮌헨 동쪽, 이자르강 너머는 보겐하우젠(Bogenhausen) 이라고 불리는 동네다.

하나의 동네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서울로 치자면 '구' 단위 행정구역 정도 되는 곳이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뮌헨 사람들은 보겐하우젠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오오...' 하는 반응을 보였다.

부촌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두 동네중 하나로 꼽히기 때문이다 :D 

(다른 하나는 Grünwald 라는 곳인데 체감상 그륀발트가 평창동 느낌이라면,

보겐하우젠은 구태여 따지면 청담동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보겐하우젠도 큰 행정구역의 이름이니만큼

모든 곳이 다 부촌은 아니다.

오히려 사실 고급 빌라들이 모인 부촌은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편이다.

U4 탈 일이 없어졌다 ㅠ

 

보겐하우젠 안에서도 내가 머물렀던 곳은 지하철(U-Bahn) Böhmerwaldplatz 역 근처였다.

역을 나오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명성높은 보겐하우젠의 부촌과 아파트들이 즐비한 평범한 뮌시너들의 세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 재미있는 동네였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뮌헨시 거주민들은 다 부자다...)

저녁에 켜지는 저 조명의 색감이 유달리 맘에드는 역이었다

 

처음부터 사실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고급 빌라단지쪽으로는 의식적인 산책 한 번 해보지 않았었지만

아파트단지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냄새와 평화로움이

내가 딱 선호하는 결의 무언가였다.

아파트 단지라고 해서 우리나라같은 그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쪽에 가까운 동네

 

사람이 들어가 사는 집 만큼이나 많은 새둥지가 보이는 동네였고

아침이면 덩치큰 고목 밑으로 쏟아져내리는 햇살이 손에 잡힐것같은 그런 동네였다.

그런만큼 내가 저 동네와 정이 드는데는 이렇다할 노력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동네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리는 대개

거리를 가득 메운 참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가 주차된 차 뚜껑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였는데

놀랍게도 저 작은 녀석들이 내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도 했다.

그래서 참나무인가...  (죄송합니다)

저 작은 녀석들은 참으로 요란도하다

 

고요하게 따스한 이 동네에서 잘 살아가던 중에

내가 이곳과 보통 인연은 아니라는걸 깨닿게된 순간이 찾아왔다.

물론 뭐 아주 특별한건 아니지만 :D

 

일단 먼저, 내가 뵈머발트플라츠에 처음 오는게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뮌헨 도착 완전 초창기에 집을 보러 다닐때 정확히 이 역에 내려

뵈머발트 공원을 관통해 집을 하나 보러 갔었던게 떠올랐다.

이 공원의 이름이 Böhmerwaldplatz

 

그때 매물로 나왔던 집은 부촌안에 있는 지상층 집이었는데

아무래도 쯔비셴을 사는 와중에 부촌쪽으로는 잘 들어올 일이 없다 보니

내가 여기에 무려 집을 보러 왔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잊고있었던것같다.

 

그 날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집을 보러 왔었는데,

집을 소개해주러 나온 중개업자한테 내가 집을 얻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냐고 물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고보니 여기가 조금 잘 사는 동네인데 너 신원이 조금 불확실해서(직장이 없다는 말)

자기가 보기에는 좀 어렵지 않겠나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줬었지...

(잘 사는 동네 아니어도 어려운게 현실이었다마는)

 

'동네 참 좋네' 생각하면서 씁쓸하게 떠나왔었다.

 

어느날 평소와 다름없이 지하철을 내려 출구를 걸어오르는데

갑자기 그 날의 장면들이 순간 살아나 겹쳐보이면서 소름이 돋아버렸다.

'여기가 거기였구나...'

뵈머발트광장의 모습

 

그래서 그 날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뵈머발트를 처음으로 한 번 걸어보았다.

뵈머발트라는 이름은 진즉에 찾아봤어서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고있었다.

Böhmerwald는 독일어로 '보헤미아 지방의' 라는 형용사인 böhmer와

숲을 의미하는 Wald가 합쳐진 지명이다.

 

그리고 그 뵈머발트라는건 진짜 실존하는 숲의 이름인데 

독일과 체코의 국경을 이루는 보헤미아 지방의 산이다.

 

유럽에서 광장, 거리, 들판 이름에 다른 곳의 지명을 붙이는건 워낙 흔한 일이라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 공원 한쪽 귀퉁이에서 누군가에게는 이 지명이 특별하게 다가왔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자취 덕분에 이 동네가 나에게도 조금은 더 특별해졌다.

기념비의 주인공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한국에선 거의 무명에 가까운 작가다

 

그 흔적이라 함은 독일어권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Adalbert Stifter)'의 기념비였다.

한국에서는 거의 읽히지 않는 작가이지만

독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즈음은 접해봤을 수도 있다.

Bildungsroman 이라는 장르를 파고들다 보면 그 가운데 서있는 작품인

'늦여름(Der Nachsommer)' 이라는 소설을 집필한 작가다.

두 권으로 된 이 책, 재미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재미없는) 책을 상당히 좋아했어서

잘 읽히지도 않으면서 밑줄을 그어가며 꼼꼼히 읽었었다!

 

아니, 근데 왜 선생님이 여기 계십니까.

 

내가 알기로는 슈티프터가 뮌헨아 살았던 적은 없었다.

오스트리아 작가라고 알고있었는데...

 

조금 더 차분히 생각해보니 슈티프터가 보헤미아 출생이라는 사실까지는 떠올랐다.

그리고 기념비 뒷면을 봤을때는 대충 느낌이 왔다.

이 기념비도 독일의 상처뿐인 과거에서부터 비롯된 돌덩이겠구나...

 

슈티프터는 당시 지명으로 Oberplan이라는 뵈머발트 자락 보헤미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보헤미아 태생의 슈티프터는

빈에서 대학을 다니고선 일생동안 지금의 오스트리아 땅에서 활동했었고

뮌헨에 산 적은 없다는게 확실해졌다.

 

기념비의 동판에 따르면 이 돌기둥은 1982년에 만들어졌는데

만든 사람은 슈티프터와 마찬가지로 뵈머발트 자락 어딘가에서 태어난 1930년생 조각가였다.

슈티프터는 자기 기념비가 여기 있다는 것조차 모르겠구나...

잘 보이지는 않지만

 

동판에는 이렇게 써있다.

'독일 뵈머발트연맹이, 뵈머발트에서 건너온 실향민들을 기리며 1982년 설치하다'

 

2차대전이 끝났을때 유럽 곳곳의 사람들은

자기들 땅에서 살아가던 이웃 독일인들의 꼴이 보고싶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독일 수용소로 밀어넣었던 것을 응징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독일인들을 같은 방향으로 추방시켰다.

 

독일의 핵심적인 영토이자 수많은 독일어 구사자들이 살고있던 지역

즉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단치히, 슐레지엔에 이르는 폴란드 지역과

체코 서부 보헤미아(프라하도 보헤미아 지방이다) 지역에서는 문제가 정말 심했었다.

이때 상당히 많은 독어-모국어 구사자들이 이때 실향민이 되어 독일로 들어왔다.

 

고향을 떠나 산다는게 절대 쉬운일이 아니었겠지.

아마 그 사람들중 누군가는 나처럼 슈티프터의 소설을 좋아했던것같다.

늦여름을 읽으며 자기들의 고향 땅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실향민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Adalbert Stifter Verein은 

아직도 남아서 독일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독-체코의 교류단체로 남아있다.

 

모쪼록 내가 여기서 슈티프터를 만나게될 줄 알았더라면 늦여름 책도 분명히 챙겨왔을텐데

미리 몰랐던게 천만다행이다.

(책은 너무 무겁다)

뵈머발트를 내려다보는 고급진 빌라, 이 공원을 보며 고향 생각을 했을까

 

어쩌다 흘러흘러 잠깐 살게된 이 조그만 동네에서조차

내 과거가 남겨두고간 흔적들이 웅크리고 있으니

이 인연이라는것의 힘이라는게 정말 신비롭고 매혹적이다.

 

그러고보면 인연이란게 마치 '사람 인'을 쓸것같지만

사실 '인할 인'을 쓰고 있다.

내가 세상의 한구석을 점유하면서 맺어가는 온갖 관계의 끈이 모두 인연일텐데

지금 이 순간은 또 어떤 재미난 모습으로 훗날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해진다 :D

 

그나저나,

인연을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다면 그는 진실로 즐거운 일을 하고있을것임에

나는 그 자가 되고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