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번째 산책①] 아주 조금 더 길게, 다시 찾은 부르크하우젠

부르크하우젠을 처음으로 다녀온건 아직 세상이 초록색과 단풍빛깔 사이에 있을 무렵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거길 다시 찾았던것같은데,

 

물론 지난번 산책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점도 있기야 하겠지만 

트라운슈타인, 란츠후트 이런 곳들처럼 강하게 마음이 끌린것까지는 아니었기때문에

이렇게 단시간내에 내가 부르크하우젠으로 향하고 있다는데에 나 자신조차도 의아해하던 기억이 난다.

[스물한번째 산책] 세계에서 가장 긴 성채를 가진 의외의 마을, 부르크하우젠

 

모쪼록 다시 찾은 시점에 그곳은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 겨울 탓인지

나뭇가지는 거의 뼈만 남아 앙상해져있었고, 전반적으로 조금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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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이 창백한 세상

 

지난 산책때는 원래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부르크하우젠으로 향하는 바람에 너무 늦게 도착했었고

그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긴 성채' 라는 타이틀을 가졌음에도 그 내부는 전혀 보지 못했었다.

 

그 점을 기억한 나는 분명히 당일 아침에 서둘러보겠다고 제법 노력을 했음에도

결국 열차를 타러 역에 도착해 한 달 전과 시간을 비교해보니 고작 두 시간 당기는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밤에 몰려온 안개가 아침까지도 미적거리면서 물러가지를 않는 바람에

세상이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는걸 고려해본다면 어쩌면 '무려 두 시간이나' 라고 해도 될까 싶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타이포그래피, 도이치반이 즐겨 사용한다

 

역시 정확히 같은 경로로 부르크하우젠 역에 도착했다.

BURGHAUSEN 이라고 또박또박 써진 입간판이 기차를 맞아준다.

내가 좋아하는 타이포그래피인데 도이치반(DB)이 즐겨 사용한다.

 

단호하고 명쾌하게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Park der deutschen Einheit

 

두 번째 방문이니만큼 성으로 향하는 길도 조금 다르게 잡아본다.

그래봐야 큰길에서 한 골목 안쪽일 뿐이지만 나름 재미있는 공간을 발견했다.

 

Park der Deutschen Einheit(독일통일 공원) 라는 길따란 공원이 그곳이었는데,

잘 정돈된 잔디밭 위로 나름 느낌있는 모자이크 벤치가 있었고 

또 한켠에는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 은행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이것들만 가지고는 그래봐야 은행나무가 있는 정원 정도밖에 되지 않을 이곳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건 공원 한쪽에 서있는 베를린 장벽의 실물이다.

베를린 장벽 실물 2점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은 2009년에

이 공원의 이름을 독일 통일의 공원으로 정하면서 베를린 장벽을 가져왔다고 한다.

베를린 시내의 것은 아니고 약간 교외지역인 Wilhelmsruh에서 가져왔지만 그럼에도 놀랍다.

 

내가 바이에른에 살고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독일이 분단국가라는걸 간혹 잊곤 하는데

독일의 통일은 35년밖에 되지 않은 살아있는, 아주 최근의 역사다.

물론 요즘 자라나는 독일 어린이들은 그런 어두운 역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것도 같지만...

 

주변 일부 독일친구들 중에서 자신들 역사교육이 죄의식과 반성에만 치우쳐있다는데에

불평아닌 불평을 털어놓은 녀석들이 조금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는게 그 친구들이 직접 저지른 잘못은 아니니깐.

 

실제로 (잘 안되는 독일어로) 얘기를 해보면 내 독일사 지식이 더 자세한 지점도 조금 있다.

정말 유감스러운건 2차대전과 뒤이은 분단이라는 어두운 역사에 집중된 역사교육 탓에

과거의 독일이 써내려갔던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조명을 전혀 못받는다는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장벽을 전시하고 분단의 아픔을 꾸준히 되새기는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분리시설이자 대립의 상징물을 박물관에 옮겨넣을 수 있을까...? 

역시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곳뿐

 

성 혹은 구시가지로 내려가려면 역시 꼭다리쪽의 이 길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썼다시피 옛 부르크하우젠은 바나나같이 생긴 땅이라서

꼭다리 부분에 매달려있는 느낌이 든다.

성벽 입구쪽 골목길

 

지난번 방문때(자꾸 이 표현을 반복하게되는군...) 예쁜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던 골목이다.

그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안쪽의 모습이 궁금함에도 애써 외면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야했었지만

오늘은 이 운치있는 골목을 아주 살짝이 될지언정 걸어보기로 했다.

뒤로돌아 한 컷, 성채의 북쪽 끝 벽이 눈에 든다

 

딱 처음 사진에서 보이는 길끝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본격적인 산책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내가 기대하던 풍경, 부르크하우젠 성과 근처의 대지가 펼쳐졌다.

두 높게 솟은 언덕배기 사이를 흐르는 Salzach와 거기를 따라 드넓게 펼처진 들판이 평화롭기만 했다.

 

유감스럽게도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맑을거라던 일기예보가 과히 빗나가서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그 구름이 미처 채우지 못한 틈바구니로 내려오는 빛줄기는 아름다웠지만...

 

그나저나 부르크하우젠 성이 길긴 참 길다.

누가 정말 땅 모양 그대로 이렇게 성을 만들게한거야 :D

처음에는 이런 모습으로

조금더 앞으로 걸어나가면 부르크하우젠의 긴 성이 보인다

 

오늘은 지난번보다는 성의 바깥부분 안뜰(이게 뭔소리야, 바깥부분 안뜰이라니)에서는

시간을 덜 보내고 휙휙 지나쳐보기로 했다.

결국은 기차 내려서 걷고 어쩌고 하다 보니 벌써 거진 세 시 가까이인지라 

오늘은 반드시 보고 말리라 마음먹고 온 박물관들 폐관까지 한 시간 조금 더 남아있게 되었다. 

 

서두른 보람이 너무 없는걸...? 다음에는 새벽에 출발해야하나...

잠깐, 그럼 한 번 또 가야한다는건데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는걸 :D 

 

자, 오늘도 여러 개의 관문을 지나야한다.

옛 기억을 되살려 다시 한 번 여기 성의 약도를 가져와보기로 했다.

여섯개의 안(?)뜰을 가진 기이한 성

 

안뜰이 여섯 개에 그나마 가장 바깥 뜰에는 성문이 지금은 없으니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바이에른 란츠후트 공작비가 살던 궁에 가 닿을 수 있다.

이게 아마 첫 문...?

이건 몇 번이더라...

여기는 확실히 안다. 2번 뜰이다

호호 정말 코앞이지롱

가장 안쪽에 자리한 1번 뜰에 도착했다

 

터벅터벅 지나치는 성문을 하나씩 세면서 걷다보니 어찌어찌 가장 안쪽 뜰에 도착했다.

오늘도 빌헬름 공작님과 바덴공국 공주님이 결혼하던 1523년 기념패가 나를 반겨준다.

 

또 나를 기다리고있는건 선택의 순간.

부르크하우젠 성 안에는 총 세 개의 박물관이 있다.

성채 박물관, 시 박물관, 상설 사진전시관 사이에서 한 개만 골라야했다.

직감상 한 시간이면 한 곳도 다 둘러보기 힘들것같았고 정말 그랬다.

 

독일은 박물관과 기록의 유지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서

아무리 코딱지만한 시골마을을 가도 마을 박물관이 있는 경우가 제법 많다.

 

시립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다른 이유라기보다도 입구가 조금 더 가까웠달까... 

 

감사하게도 어학당 학생증으로도 학생 할인을 받아주셔서 4유로에 입장권을 구매했다.

시립박물관 2층은 미술관으로 사용중이다

 

시립박물관 2층은 미술관으로 꾸며져있었다.

어느정도는 물론 자신들 도시에 대한 사랑을 담아 더 있어보이게 써두기야 했겠지만,

설명에 따르면 부르크하우젠은 중세 후기부터 이미 예술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1476년부터 시작된 이 성채 자체의 증축이 건축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단다.

그래서 심지어는 당시 성 건축가들이 모여살던 오두막이 거의 건축학교처럼 역할했다고...

머잖아 유명세를 탄 이곳 건축명장들은 인근지역의 수많은 후기고딕성당 건축을 책임지게 된다.

 

부르크하우젠은 바이에른-란츠후트 공국이 바이에른-뮌헨에 통합(1503)된 이후에도 번성했다. 

특히 16세기 후반이 되면 시에 공식적으로 두 명의 전속화가와 한 명의 조각가 직책을 둔 기록이 있다.

 

부르크하우젠 영주가문, 사제, 귀족, 신흥브루주아 모두가 가옥과 성당 건축을 의뢰하고

제단을 만들고 또 초상화 그림을 의뢰하면서 일거리가 넘쳐흘렀다고 한다.

개인으로서는 발주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이미 작업공동체, 공방을 꾸리는것도 일반적이었다.

당대 동네사람들이 의뢰한 초상화들, 신분이 제법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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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다시 한 번 등장하는 나폴레옹의 세속화정책으로 사제계급이 몰락하면서

여기 예술가들의 주 수입원의 거대한 한 축이 무너져버리고 예술가들도 대거 실직하기도 했지만

용케 또 중요한 예술가들 몇 명이 19세기 후반에 부르크하우젠에 정착하면서

가까스로 명맥은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과 2차대전의 합작으로 조금 황폐해진 성에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Die Burg(성)' 라는 예술가그룹을 결성하고 모여살기 시작함으로써 

부르크하우젠은 다시금 예술인들이 활동하는 힙한 마을이 되어있다.

이 길다란 성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예술가라는것.

요한 네포무크 델 라 크로체, 다윗왕 앞의 아비가일

 

그런 예술가들중에서 오늘날 이름값이 가장 높은 사람은(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처음듣지만)

요한 네포무크 델 라 크로체(Johann Nepomuk della Croce, 1736-1819)다.

이탈리아 티롤 태생의 이 화가는 열여덟 살에 부르크하우젠으로 와서 당시의 공식화가

Kröz의 공방 수련생이 되었다.

 

운이 따라다니는 스타일인지 스승님이 2년만에 돌아가주셨다.

그리고 준비된 남자 네포무크는 시장 앞에 가서 자신이 스승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물밑작업을 위해서 시장 부부 초상화도 한 점 그려주고 한 끝에 스승의 사망으로부터 2년만에 

계승권을 인정받고 스승님의 공방도 완전하게 인수하는데 성공한 크로체.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수인 83살에 이르기까지 60년을 넘는 시간동안 부르크하우젠에 머무르면서

아주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주로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초상화, 성화, 역사화를 그렸다.

 

여느 화가들처럼 자기애가 강한 편이어서 자기 얼굴을 많이도 그려넣다는데

위 사진에서 빨간 동그라미 부분이 본인 되신다.

화살맞고도 못죽어 두 번 처형당한 성 세바스티안, 크로체의 작품

 

[스물세번째 산책①] 발할라로 가는 길, 레겐스부르크의 성 에메람

 

사실 다소 생소한 화가 이름임에도 나는 크로체의 작품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크로체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가 '모차르트 가족'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여기 박물관에는 없는게, 모차르트가 주문했으니 모차르트 집으로 배달되었겠지...

크로체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모차르트 가족 초상화

 

전시를 보면서 처음엔 여기 그림 보유량이 상당히 많아서 놀랬는데

돌아볼수록 전시 자체가 너무 알차게 구성되어있고 지루하지 않게끔 잘 짜여있어서 더 감탄했다.

군데군데 아이들을 위한 설명들도 있어서 아이들보다 독일어를 못하는 나에게도 딱 맞았고

사실 몇몇 내용들은 구태여 아이들이 아니어도 어른들에게도 충분히 재미난것들도 있었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한정된 이야기다.

밑에 둥근 원판을 돌리면 건축길드가 어디에 뭐를 만들었는지 표시된다

 

그냥 가만히 서서 읽기만 하는게 아니라 관람객의 행동이 더해져야 하는것들이 괜찮아보였다.

전시가 아무리 좋아도 그냥 글더미에 묻혀있다 보면 피곤해지기 마련인데 

독일 박물관들이 이런게 참 잘 되어있는것같다.

천장 프레스코화는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알려주는 스크린

1제곱미터당 평균적으로 하루가 걸렸다는 설명

 

어떤 곳에는 스크린이 설치되어있어서 넘겨보거나 클릭해보기도 하고

또 다른데는 평균적으로 천장 프레스코 1제곱미터를 작업하는데 하루가 걸렸다면서

하루에 작업한 구간별로 조각을 쪼개놓아 아이들이 집어보면서 놀 수 있게도 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떤 전시물은 서랍을 열어야 나오기도 했다.

들려주고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공간이 없을때 참 좋은 방법이군 싶었다 :D

어떤 전시물은 서랍을 열어야 나오기도 한다

 

간혹가다 창밖으로 주변 풍경이 내다보이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그림같다.

어느덧 성 안에서도 끄트머리에 도달해있다

 

한 층을 꼬박 바로크-로코코 그림에 파묻혀 돌아다닌 끝에(음악이고 미술이고 그 시대거는 좀 어렵다)

내가 조금 더 좋아할법한 전시섹터에 도달했다.

중세 성벽 작업장과 병기고를 재현해둔 모습

Georg 부공의 궁정 하인들이 입던 의상

 

중세 성벽에서 있을법한 일들, 예를들어 성벽 축조와 병기고같은 것들이나

공작의 침실, 식사모습, 약초장, 혹은 게오르그(Georg) 부공 재위당시 궁정 하인들이 입던 의상...

그런 것들을 나름 괜찮게 전시를 해두어서, 

내가 아이딸린 독일 아빠라면 정말 아이들 손잡고 와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엄청 서둘면서 한 층 전시실을 다 둘러보는데 한 30분이 조금 더 걸렸던것같다.

관심있는 사람이 마음먹고 제대로 관람하려면 한 시간보다 더 잡아야지 않을까 싶은 큰 박물관...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조금 나도 쉬어야할것같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