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산책] 트라운슈타인에 내 마음을 옮겨 심다

10년 전 이 무렵 쾰른에서 교환학생을 시작한 나는 

그 당시에도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쾰른 남쪽으로 20분정도 가면 브륄(Brühl)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아우구스투스부르크(Augustusburg)라는 예쁜 성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성 영지의 아주 바깥쪽에는 사냥용 별장(Falkenlust)이 딸려있는데

정원에서 그 별장으로 가는 길목, 숲이 끝나는 지점에 

환상적인 들판이 펼쳐져있었다.

무려 기차 선로가 그 들판을 가로질러서 낭만까지 더해진 내 비밀 공간이었다.

 

별달리 할 일도 하고싶은 일도 없을때면

책 한권 딱 챙겨들고 땀 안나게 처언천히 걸어가 

저 곳의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보곤 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절의 평온함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다.

 

이제는 쾰른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서

나만의 비밀장소로 남겨둘 필요가 좀 줄어들었다 :D

누군가는 나 대신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리를 공개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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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저 날은 평소처럼 공연을 보고 잘츠부르크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날은 여느 날들처럼 화장했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하루.

미라벨 너머로 보이는 호엔잘츠부르크

 

날씨가 좋은 날이면 걷고싶은 열망에 휩싸여서

공연이 끝나고 버스를 타지 않고 미라벨까지 걸어가는 편을 택했다.

 

저 멀리 보이는 호엔잘츠부르크 바로 밑 공연장에서부터 걸어봐야

유럽 도시가 그렇듯 느린 걸음으로 30분이면 충분했고,

피차 기차는 다음 정각에 있을거라서 이 정도의 산책으로는

버스타고 중앙역에 내려서 내 최애 케밥집에서 포장해갈 시간까지 넉넉하다.

사람들이 왜 미라벨을 좋아하는지 알겠다

 

그러고 보니 특별한 일이 하나 있는 날이긴 했다.

한국 친구들과 줌 미팅을 하는 날이었다 :D

코로나 때부터 얼굴보기가 원체 쉽지 않아 시작한 정례 줌 미팅인데,

이번에는 내 시차를 배려해서 오후에 잡아준 그 시간이 딱 기차시간 10분 전이다.

 

보통 한 번 모이면 한 시간은 우습게 수다떠는데

문제는 유럽 기차에서는 달리는 중에는 신호가 말 그대로 사라진다.

카톡 메세지 하나 보내는데도 20분 걸리곤 하니

기차에서는 아예 핸드폰은 포기하고 독서를 하거나 잠을 자거나

혹은 독서하다가 잠을 잔다.

 

아쉽지만 10분정도 통화 하다가 어느 순간 끊기면 자면서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역시 기차가 잘츠부르크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화면이 멎었다.

 

아무리 혼자 잘 노는 나 라지만 유럽생활이 심심하긴 했던지

20분만에 기차에서 내려버렸다. 

기차는 한 시간 뒤에도 다시 올테니깐 :D  

친구들에게 독일 하늘을 보여주니 반응이 역시 좋다.

독일 시골사람들의 발이 되는 기종

 

그렇게 내려버린 곳이 트라운슈타인(Traunstein), 

작은 마을들을 이어주는 노선들이 발착하는 나름의 거점도시였다.

 

다시 줌에 접속해서 이어폰을 꽂고 신나게 수다를 떠는 산책자.

아쉽지만 데이터가 많지 않아서 화면은 조금 지나서 껐다. 

 

산책계의 자린고비 산책자,

기차타고 다니며 눈여겨봐둔 곳이 생각났다.

잘츠부르크를 벌써 열 번 가까이 왕복하니 

슬슬 열차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들이 눈에 익기 시작한 참이다.

 

그 곳에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 내린 것도 운명이려니 싶어 

음성으로 수다를 이어가며 두 다리는 씩씩하게 디뎌나가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계획이라고는 단 한 귀퉁이도 채우지 않은 아홉 번째 산책이 시작되는 순간.

멋들어진 유럽식 철교를 만났다

 

구글맵에 목적지를 찍었는데 트라운슈타인 마을을 관통해서 가라고 한다.

음... 수다떨기에는 마을은 좀 주의가 분산될 것 같았다.

그냥 철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어떻게든 만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대충 방향을 잡아본다.

철교 기둥 옆에 보도가 숨어있다

 

일단 트라운 강을 건너는 다리는 찾았다. 

이제 어떻게든 철길을 따라 걸어갈 길만 찾으면 언젠가 내 목적지가 나올 터.

선로와 나란히 나 있는 오솔길을 봤었기에 나름 확신에 차있는 초행길.

너로구나!

 

찻길에서 갈라져올라가는 샛길을 발견하고 

바로 느낌이 왔다.

'너로구나!'

???

 

코너를 돌자마자 믿음에 금이 갔다 ㅋㅋㅋ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나무 계단에서

최근에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어쩌겠어, 못 만나면 다음에 다시오면 그만이지

 

아니... 이곳을 발견한건 내 큰 행운이었다.

입구마저 하트 모양으로 운명처럼 찾아온 나의 개구멍

 

이걸 언급하는게 처음인지 아닌지 헷갈리는데,

내가 기억하는 한 어릴적 첫 꿈은 기차 운전사였다.

물론 그 꿈은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레 사그라들고 다른 직장을 찾았지만

아직도 선로들로 가득한 기차역에 가면 설렘이 가득해지는 나다.

 

저 잡초 무성한 계단을 오르고 나니 오른쪽에 개구멍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개구멍 수풀 사이로 철제 선로가 영롱하게 햇빛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갺... 

저기가 트라운슈타인 마을인가보다

줌을 조금 당겨봐도 멋져...

 

심장을 부여잡고 올라가보니

이곳은 트라운슈타인 최고의 뷰맛집이었다.

 

기찻길과 자갈, 수풀, 근배경에 트라운슈타인의 스카이라인

마을 뒷편의 언덕과 먼 배경의 알프스, 그리고 하늘에 구름까지...

 

따로 떼어놔도 아름다운 것들이 층층이 함께 놓여있는 장엄한 풍경 앞에서

한참을 넋놓고 서있었다.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사진 남길 생각도 들기 시작할 정도로

매료되어있었다.

누군가가 또 잘츠부르크로 가고있다

 

가만히 서서 기차가 한 네 다섯대 지나갈 동안 지켜보다가

다시 길을 떠나보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시야가 열릴 때마다 설레와서 좀처럼 앞으로 가기가 힘들다

벤치에서의 뷰는 이렇다

 

머지않아 벤치를 만났지만 쉬어가지는 않기로 한다.

오늘 앉을 벤치는 정해져있다.

꼭 그곳 나무그늘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고 싶어서 시작한 산책이었다.

 

아주 잠깐의 숲길을 통과하면 민가 몇 채가 나오는데

이 마을을 에둘러 기찻길 쪽으로 내려가니 드디어 내가 봐둔 오솔길과 만났다.

너무 신나는 오늘의 산책길 ㅠㅠ

Waging에 들어가는 열차는 좌회전을 하기 위해 좌측통행중이다

 

역에서 만났던 그 기차를 다시 만났다.

다시 보니 반가워! 

 

언젠가 마음이 다시 당기는 날에는

저 열차를 타고 그냥 한 번 굽이굽이 들어가봐야겠다.

저기 오늘의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 큰 나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넓은 초원과, 언덕 위에 자리잡은 성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차 안에서 볼 때마다 너무 평화로워보였던 성당이었다.

날씨가 너무 쨍하게 좋아서 오히려 인위적인 느낌마저 들지만, 내 사진은 보통 100% 무보정이다(귀찮음)

 

위 사진 오른쪽 앞에 나홀로 떨어진 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내가 꿈에 그리던 벤치는 그 친구 그늘 아래 있다.

내 새로운 아지트가 되...고싶은 주인공 벤치

문학동네 최고

 

요즘 읽고있는 책은

프랑스 작가 구스타프 플로베르의 '세 가지 이야기'

말 그대로 세 개의 단편을 한 데 엮은 단편집이다.

 

저 자리에 앉아 첫 번째 단편을 다 읽었고,

글을 쓰는 이 순간에는 그 동안 독서를 좀 소홀히한 덕분에 마지막 단편의 끝자락을 읽고있다.

 

역시 항상 책 한 권씩은 챙겨다니면

갑자기 찾아온 산책길도 호사스러운 나들이가 되어준다.

먼저 가렴! 나는 좀 천천히 가려구

 

내가 타려고 했던 다음 기차가 지나가는게 보인다.

아무렴 뭐 어때. 

저 선로를 따라 기차는 계속 온다 :D

언덕은 한 번 올라보고 돌아가야지

 

위에 썼듯 단편 한 개를 다 읽고 다시 일어났다.

역으로 천천히 돌아가기 전에 성당 구경을 해보려고 했다.

 

아쉽지만 성당 문은 닫혀있었는데,

그래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란게 또 아름다운 법이니깐.

나무그늘은 모두에게 소중하다

 

책을 읽던 중간 어느새부터 널찍하게 퍼지는 음악소리가 들렸었는데,

언덕 위 나무그늘 뒤에서 주인공을 만났다.

트럼본을 연습중인 아저씨 한 분은 역시 뙤약볕 벤치 대신 

나무그늘을 선택해 숨어계셨다.

(나만 더운건 아니었어)

 

같은 길을 택해서 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트라운슈타인 마을은 다음을 위해 남겨놓기로 한다.

그렇게라도 또 올 핑계거리를 마련해두고 싶었다.

 

뮌헨에서 트라운슈타인은 편도 1시간 20분이 걸리기 때문에 

교환학생때 브륄 다니듯 그렇게 쉽게 올 수는 없다.

로젠하임에 집을 구하면 여기도 좀 자주 오게될까 싶어 로젠하임에도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고싶은 동네가 하나씩 자꾸 늘어만간다

반가운 무궁화

 

걸어서 올 때는 안보이더니 

다시 역으로 돌아가는데 활짝 만개한 무궁화 나무가 심어진 정원이 보였다.

아무래도 통화하느라 주변이 잘 눈에 안들어왔나보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친구들과의 통화는 아까 철교 밑에서 트라운 강을 건널때 즈음 끝났었다.

역시 사람이라는게 사는데 다른 사람들의 온기가 꼭 필요한것같다.

친구들도 내가 와있는 중에 한 번씩은 나랑 놀아주러 오면 좋을텐데 :D

 

이 나이먹은것들 휴가는 쓸 수 있으려나...

뮌헨으로 돌아가는 내내 알프스가 따라붙는다

 

이런저런 생각, 행복함 그리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뮌헨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얼른 가서 저녁은 해먹어야지.

점심은 케밥을 사먹었기 때문에 한 동안 외식은 없을거다.

(물론 케밥은 독일에서 맥도날드 반 값에 즐길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완전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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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달볶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니

발코니 너머로 해가 넘고있다.

 

한 켠에는 성격 급한 달도 떠서 미리감치 일을 시작한 저녁의 시작.

꿈결같은 하루가 있다면 바로 오늘이 아니었을까.

 

Das E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