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산책] 아, 잘 있거라 잘츠부르크야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고, 고독만이 흐르고있다...고 꼭 쓰고싶은게

오늘은 어인일인지 클래식이 아닌 노래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뭐지, 나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한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나!

 

모쪼록 이번 포스팅은

'열한 번째 듣다 : Wiener Philharmoniker & Gustavo Dudamel' 에서

바로 이어진다.

(사실 똑같이 열한 번째로 맞추고싶어서 템포 조절을 좀 했다 :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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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주말같으면 공연이 한 시에 끝나니

챙겨온 바나나 한 개를 먹고 뮌헨까지 돌아가서 네 시 경에 점심을 먹거나

간단하게 케밥을 사먹고 출발해서 저녁을 보복과식하는 산책자인데,

 

하루에 두 개의 공연을 보려 하니

평소에는 하지 않아도 되던 끼니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 고민은 무슨 고민이냐, 케밥으로 간다

2) 첫 잘츠 방문때 왔던 피자집이 그리우니 다시 가본다

3) 블롬슈테트 공연날 먹었던 노점식당이 제일 가까운데다가

    비오고 날도 쌀쌀한데 역시 국물이 최고다

 

중증 선택장애를 앓는 내게 감사하게도

피자집이 오후 네 시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탓에 선택지가 두 개가 되었다.

 

블롬슈테트 공연일기에서 먹은 얘기는 생략했었는데,

(그 때는 공연일기는 순수하게 공연 얘기만 쓸까 했었다)

사실 상당히 준수한 베트남 식당이 하나 있다.

 

 

축제극장을 나서자마자 바로 왼쪽이 항상 버스를 타고 내리는

카라얀 광장인데 광장 남서쪽 방향으로 

꾀나 시선을 끄는 터널이 있다.

터널 서쪽 출입구

 

이 터널의 이름은 지그문트 문(Siegmundstor).

별거 없어 보이지만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던 녀석이다.

 

잘츠는 애시당초에 Mönchsberg(묀히스베르크, 묀시 산)의 호엔잘츠부르크를

기준으로 그 북쪽으로 형성된 마을이었지만,

도시라는게 으레 그러하듯 잘츠도 거주민이 늘어나면서 

Mönchsberg 너머에도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1760년대 지기스문트(Sigismund von Schrattenbach)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지시로

통행용 터널 공사가 시작되어 1768년에 완공되었고,

그 이후로 잘츠부르크의 성문 역할까지도 맡아온 기특한 친구다.

 

완공 당시의 이름은 Neutor, 즉 '새로만든 문'이었다.

기암절벽이던 곳에 갑자기 성문이 생겼으니 나름 일리있는 작명이다.

 

그리고 그전부터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있던 광장이 지금의 카라얀 광장인데,

사실 원래의 이름은 지그문트 광장이었다.

 

불쌍한 지기스문트...

잘츠부르크가 카라얀이라는 존재감 찐한 거장을 배출해버리면서

광장 이름을 카라얀 광장으로 바꿔버리기로 한다.

카라얀이 만든 축제극장 바로 옆 광장이기 때문.

(그 정도는 대접받을 수 있는 위인이긴 하지)

 

그 대신 지기스문트의 후손들은

저승에서 대노하고 있을 대주교를 달래주려고

터널 이름을 Siegsmundtor로 바꿔줬다.

 

어쩌면 더 뿌듯해 할 지도 모르겠다.

자기의 치적물에 이름이 제대로 찾아갔으니 말이다.

세상 지그문트들의 아버지, 브르군트의 지기스문트 왕

 

위의 사진은 서편 출입구(신시가지에서 바라본 방향)인데,

지기스문트 대주교의 이름의 기원인 지그문트 성인의 조각상과

대주교 아저씨 출신 가문인 Schrattenbach 가문의 문장이 올려져있다.

(지기스문트와 브르군트 아저씨는 또 독일문화에 나름 영향력이 있는지라

언젠가 자세히 써볼 수도 있겠다)

 

물론 대주교 흉상이 빠지면 섭한데, 시내인 동편 출입구에조각되어있다.

 

후... 또 밥 얘기 하다가 삼천포로 빠져버린 산책자.

이 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이런저런 아시아 음식을 파는 베트남 노점이 있는데,

지난 7월 블롬슈테트 공연을 보고 나서 점심을 먹었었다.

 

그 날도 딱 오늘같이 비가 부슬부슬 내렸었고

추위와 허기는 좀 달래고 뮌헨으로 돌아갈까 싶었다.

게다가 그 무렵이면 아시아 음식도 좀 그리웠을 때였기도 했다.

빗물섞인 7월 어느날의 점심

 

주인장이 쌀국수는 오래걸린다고 태국식 수프를 추천해서

쌀국수를 먹고싶던 마음은 달래주지 못했지만

제법 맛있는 한 끼 식사였다.

노점식당이라 흩날리는 빗방울이라는 낭만 한 스푼도 들어간 국물이었다.  

 

여하튼 그 한 끼 식사 덕분에 지그문트 문을 지났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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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음식점과 거기에 가는 길 얘기를 한참 늘여써서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것 같지만 사실 아니다.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한 충성도가 상당한 인물이라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잘츠에 안올거라 생각하니

후회없이 케밥을 한 번 더 먹고싶었다.

 

역시 훌륭한 선택이었다.

중앙역에 다녀오면서 따뜻한 버스에서 시간도 적절히 보냈고 말이다.

날이 화창하면 이곳이 얼마나 화사하고 예쁘겠나

 

두 시간을 어디에서 보낼까 고민하다가

매번 들러보려다가 지나치기만한 성 페테 수도원 묘원에 가보기로 했다.

우중충한 날씨에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렵의 묘지들은 화창한 날과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일 때가 많다

 

죽음이야 이들에게도 물론 슬프겠지만

묘지만큼은 아름답게 가꾸면서

자주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이 사람들이 현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유럽 처음왔을때 동네 묘지에서 러닝뛰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피차 죽음이란게 삶 바로 옆 도처에 널려있는지라

이 방식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묘지 입구는 푸니쿨라 승강장 바로 옆에 있다

 

묘지는 페터수도원 정문 쪽에서도 들어올 수 있고

혹은 푸니쿨라 승강장 가기 직전에 오른쪽을 보면 작은 입구가 하나 더 있어서

호엔잘츠부르크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러봐도 좋을 곳이다.

 

사진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푸니쿨라 승강장 건물에 물레방아가 돌고있었다.

그 위에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빵집도 하나 있는데 

옛날에는 이 물레방아를 사용해서 밀을 갈았다고 한다.

 

나는 참새가 아니라서 방앗간은 쉽게 지나칠 수 있다.

관광객이 제법 찾는 성 페터 수도원 묘지

 

우중충한 날씨에도 묘지를 찾는 관광객이 제법 되었다.

조경도 잘 되어있고 묘비석 위에 심어둔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빗속에서 꽃들이 화사하게 펴있었고 특히 몇몇 수국은 신나하는게 느껴질정도.

 

묘지 뒤로 절벽이 버티고 서있어서 묘한 안정감까지 드는 이곳 묘지였다.

그러고보니 한국 묘는 아이스크림 쿠겔 모양이라 애초에 달콤함을 품은것도 같다

 

어느새 비는 그쳐있긴 했는데 날은 이미 식어버려서 쌀쌀했다.

아무래도 너무 바깥에서 오래 떨면 다음 공연에서 졸도할 수도 있는 까닭에

페터 수도원 성당에 피신해있기로 했다.

수도원 성당을 가려면 일단 수도원 안뜰로 나가야한다

 

사진 속의 첨탑은 수도원 성당은 아니고 그 옆에 붙은 부속 예배당이다.

성당(Stiftskirche St. Peter) 본당 입구는 수도원 안뜰로 나가야 찾을 수 있다.

 

여기 수도원은 모든 독일어 사용 지역들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츠부르크 도시의 역사가 시작된 뿌리이기도 하다.

 

그만큼 유서깊고 잘츠부르크에서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은 곳이다.

적은 자연채광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당이었다

 

이 오래된 로마네스크 바실리카에는 꼭대기층 부분에만 자연광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중소규모인데도 제법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내 미학적 기준에서는 그렇게 아름다운 성당까지는 아니긴 했다.

벽면에 회화작품들을 붙여놓은게 내게는 마이너스 요인.

그래도 따뜻한 느낌의 성당인건 맞다.

 

짧게 기도를 올리는 사이에 몸에 온기가 다시 돌아왔다.

(사진의 색감과 날씨에 대한 묘사 때문에

글을 써내려가는 나에게 조차 마치 초겨울같은 인상을 주는 포스팅이 되어버렸는데

지금 8월 말 한여름 어느날의 일기를 쓰고있다는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어나서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곳곳에 이 성전 안에 묻힌 사람들의 묘비석이 있었다.

 

물론 이 동네에서 방구좀 뀌었다는 양반들이었겠지만

대부분 내가 모르는 이름들이었는데,

한 명은 확실하게 식별 가능했다.

 

"미하엘 하이든(Michael Haydn)"

 

음악의 어머니?(헨델이라함) 이런거에 약해서...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 하이든 같지만 그 동생이다 :D

사진이 좀 이상해서 생략하지만 68년이나 삶을 누리다 갔다고 한다.

 

나는 사실 몇 백년정도는 살아보고싶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갈지, 어떤 흥미로운 일들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나만 사는게 이렇게 재밌나... 별로 자극적으로 살지도 않는데)

페터 수도원 안뜰

 

공연까지 30분정도 살짝 더 남아서 

바로 옆이지만 슬슬 움직여보기로 했다.

(공연장 화장실이 최고니깐)

 

안뜰을 지나 Haus für Mozart 건물 방향으로 나가는데 

처음보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시계를 보면서 애써 그냥 지나치려했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계단을 보면 그 위에 뭐가 있을지,

좁다란 골목 그 너머엔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

갈림길 그 반대편에는 어떤 세상이 나를 기다릴지 궁금해서

 

기어이 한 번은 꼭 직접 가보고야 마는 나는

이번에도 돌벽 사이로 굽이굽이 난 계단을 서둘러 뛰어올랐다.

내 호기심을 잔뜩 자극해버린 바로 그 계단

 

올라가다 보니 나름 이름도 있는 계단이었다.

Clemens-Holzmeister-Stiege

아마 만든 사람의 이름이겠지.

Mönchsberg 산 윗마을에 다다랐다

 

계단 위 세상에서는 잘츠부르크의 지붕들이 내 눈 높이에 다가왔다.

저 뒤로 호엔잘츠부르크만이 여전히 올려다보일 뿐이었다.

피차 우중충해서 60년대 느낌을 내보려 했는데 보정작업은 별로 해보질 않아서 미숙하다

이곳 윗마을에선 잘츠부르크의 지붕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엄밀히는 다음 공연이 끝나고서야 올해 여름 잘츠부르크와의 작별일테지만

기왕 마음에드는 공간에 다다른 김에

미리 작별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아 아아아하아아아~ 잘있거라 잘츠부르구야
미스김도 잘 있어요 미스리도 안녕히
온다는 기약이야 없으랴만은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마라

버리지마라

 

아 또다시 찾아오마 잘츠부르크야

 

어쩐지 시작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60년대로 회귀해버리면서

잘 끌어올린 감성을 애매하게 흩뿌리며 끝나는 오늘의 일기 ㅎㅎ

 

그나저나 음악으로 가득하던 그 여름날이 그립긴 하다.

 

25.08.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