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세비야] 색채와 맛, 그리고 열기마저 진한 정열의 도시 세비야 ②

어디까지 했더라, 맞아

젤라또를 한 컵씩 집어들고 다시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이 거리는 Av. de la Constitución, 스페인어 사전에 의하면 '헌법의 거리' 라는것 같다.

히스팔리스 분수가 멀리 보인다

 

세비야를 찾는 사람이라면 어지간하면 무조건 한 번 이상은 걷게되는 거리다.

세비야 대성당, 고문서보관소, 알카사르와 같은 랜드마크가 이 길에 모여있기도 한데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오렌지(나랑하) 나무가 심겨진

널찍한 거리 양쪽의 건물 실루엣만으로도 충분히 매력 가득한 길이다.

 

자동차는 들어올 수 없는 이 넓다란 거리에는 세비야 유일의 트램 노선이 다니는데

인도로부터 트램 길을 구분해주는 유일한 수단은 바닥에 깔린 선로 뿐이다.

사람이고 자전거고 트램을 거의 스치듯 지나다니는걸 보면 유러피언의 심드렁함에 감탄하게 된다.

뮌헨도 칼스플라츠부터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극장 앞까지는 이런 느낌으로 트램이 다니지...

세비야의 트램

 

세비야는 사실 트램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 싶긴 하다.

하나뿐인 노선 T1에는 역이 다섯 개 뿐이다 ㅋㅋㅋ

시청 앞 누에바 광장 역에서부터 헌법의길을 따라 쭉 내려온 다음 동쪽으로 조금 더 갈 뿐이다.

음... 어쩌면 여름에는 이 짧은 거리마저 트램을 타고싶어질수도는 있겠다.

크리스티나 정원

 

히스팔리스 분수가 빛을 사방으로 뿌려대는 헌법의 거리가 끝나는 곳 너머로는 

사뭇 대조적으로 크리스티나 정원이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다.

히스팔리스는 세비야의 로마시대적 이름인데, 에스파냐랑 겹치는 부분이 좀 있어보인다.

 

여하튼 나는 이 크리스티나 정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규모있는 정원은 아니지만 빛과 평화로움으로 가득한 공원이었다.

조금만 덜 더웠다면 쉬어감직도 했을텐데.

산 텔모(San Telmo) 궁전

 

정원 끄트머리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산 텔모' 궁전이라는 곳이 있다.

붉은색과 밝은 황토 벽돌이 질서정연하게 쌓아올려진 채로 역시 햇볕을 반사하는 이 궁전은

지금은 세비야가 주도로 있는 안달루시아 주정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도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왕궁이나 행궁, 읍성 이런데를 

지자체 사무소로 활용했으면 어땠으려나 싶다.

목조건물이라 유럽만큼 관리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으려나?

하기야, 우리네 건축이라는게 인테리어를 새로 해버리면 매력이 확 떨어지긴 하지.

 

산 텔모 궁전에서 세비야 대학을 끼고 아주 조금만 걷다보면 

스페인광장을 품고있는 마리아 루이자 공원 입구가 나온다.

그 즈음부터는 어디에서나 스페인 광장의 남쪽 탑을 볼 수 있다.

스페인 광장의 남쪽 탑

그리고 광장에 들어섰을때 나와 동행님은 말 그대로 압도되어버렸다.

와... 스페인광장은 정말 특색있는 곳이었다.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을 다 다녀보면서 크고 멋지다는 광장을 많이도 다녀봤는데

이런 모습을 하고있는 곳은 또 처음이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걸까.

이런 아름다움을 자기들 곁에 두고 이렇게 즐기고 있었다 생각하니 세비야인들이 야속할정도였다.

드론이 없이는 어떻게 해도 전경을 찍을 수 없다

 

스페인 광장 역시 물론 스페인어로는 '에스파냐 광장' 이다.

거참 남의나라 이름을 너무 편하게 스페인으로 바꾼게 아닌가 모르겠다 영국놈들.

(독일애들도 물론 슈파니엔이라 할말 없지, 다들 'E'는 어디에 내버렸어)

 

오래된 건축물처럼 보이겠지만 

1929 아메리카 박람회를 앞두고 한 해 전에 만들어진 100년도 안된 새 건축물이다.

 

Exposicion iberoamerica de 1929

이베로 아메리카 박람회는 스페인과 남미, 북미 대륙 국가들이 참가한 박람회였다.

나머지 국가들 섹션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는것 같다.

1929년 5월부터 시작해서 1930년 중반까지 일 년이 살짝 넘게 이곳 세비야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박람회의 한중간에 터진 대공황이 1차대전 이후 유럽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끝내버렸으니

그 전에 박람회 준비가 모두 끝난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적자가 났을지언정 그래도 개최는 하긴 했으니 말이다.

북쪽 탑 방향 풍경

 

회랑의 열주를 따라 걸을 수 있다.

낮동안에는 아쉽게도 이곳은 그늘이 거의 없다... 그냥 더위에 익숙해지는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긴 회랑 바닥에는 고급진 타일이 깔려있고 난간 안팎으로 잘 구워진 자기 타일이

스페인 각지의 도시를 보여주고 있었다.

세비야는 거의 남쪽 끝에 있다

아침에 떠나온 발렌시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중 처음 만났던 스페인 도시, 팜플로나

 

사실 회랑 안쪽 타일보다도 바깥에 장식이 더 재미있는데 내가 엄청 덥긴 했는지 사진을 안남겼다.

거기에는 그 지역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벤트들이 그려져있었다.

내 기억에 세비야 칸에는 이슬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장면이 표현돼있었다.

정확히 가운데 탑 아래

 

정확히 한 가운데 탑은 상단부가 아치로 장식된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

그 모습과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을 좀 남겨볼겸 모처럼 만난 그늘에서 땀도 식히려고 앉아서 쉬는데

위 사진 자기애가 넘치는 저노마가 20분동안 저러고 서있었다. 

뭔가 스페인광장의 색감과 위엄은

시선을 뺏어가는 다른 피사체가 없을때 더 잘 살아나는것 같다.

북탑 방향

 

한 바퀴를 다 돌았다. 

공원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박람회를 위해 각 나라들이 만든 파빌리온들이 있다고 했지만

허허... 10월 중순의 더위에마저 굴복하고만 우리들이었다.

스페인에 왔으면 스페인 방식대로, 숙소로 돌아가 시에스타를 좀 즐기기로 했다 ㅋㅋ

Torre del Oro

 

대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황금의 탑 정도는 멀찌감치서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과달키비르 강(엄밀히는 따로 판 운하)가에 있는 황금의 탑(토레 델 오로)은

지금은 홀로 뚝 떨어져있지만 원래는 무어인들이 알카사르의 일부로 지은 감시탑들중 하나였다고 한다.

알카사르가 헐린 뒤에도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서,

콜럼버스가 항해 끝에 돌아와서 귀환을 알리는 보고를 올렸다는 둥 

황금을 보관해뒀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ㅋㅋㅋ

다시 한 번 헌법의 길

차양의 길

매력 넘치는 골목

 

건물을 좁게 마주보게 지은게 제법 효과가 있긴 있다.

태양이 딱 정수리 위에 떠있는 시간이 지나면 그늘이 제법 짙어지는데

골목을 지나는 차들이 라이트를 켜고 다닐 정도다.

 

뭐 그렇다고 엄청 시원하고 그렇지는 않다 ㅋㅋㅋ

숙소 옥상에서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수건 챙겨서 샤워부터 하고는 꿀같은 낮잠을 즐겼다.

잠에서 깨니 시간이 은근 되어있기에 옷차림을 좀 정해볼겸 옥상에 올라가봤다.

옥상의 전망은 예상치못하게 엄청 훌륭했다.

이 민박의 최대 매력을 꼽으라면 나는 옥상을 들겠다.

 

저 멀리 보이는 돔은 Hermandad del Valle 라는 성당의 돔탑인것같다.

그 바로 앞이 유명한 현대건축물 '메트로폴 파라솔' 이 있는 광장이다.

 

그리고 이제 대망의 저녁식사

동행분이 서칭 끝에 엄청난 식당을 알아오셨다.

원래 포스팅에 인생 이베리코 맛집이라 자기만 알고싶다고 가게 이름을 써두지 않았는데

포기를 모르는 이 남자는 블로그 주인에게 비밀댓글을 남겨서 기어이 그 가게를 알아냈다.

 

과연 구글맵 평에 한국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독일어는 즐비함).

아... 또먹고싶다

 

우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날생선 요리와

파타타 브라바스, 이베리코 타파스를 시켜놓고 와인과 맥주를 열심히 마셔재꼈다.

파타타 브라바스는 스페인 어딜가나 파는 감자요리라는데

가게마다 각자의 감자 스타일과, 그 가게의 특제 소스를 가지고 만들어 판다.

 

남부지방의 브라바스 소스는 약간 맵싹한게 특징인데

한국인 입맛에 찰떡인것같다 ㅠㅠ

이 가게거가 그 와중에도 가장 맛있었다...

자유로운 이 광장문화

 

가게는 작은 광장 한켠에 있었는데, 

밤이 되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술 한잔 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독일사람들과 정말 다르게 이들은 모르는 사람들과도 엄청 반갑게 수다를 떠는것같다 ㅋㅋ

 

조그만 휴먼스케일의 광장에서 술 한잔과 함께라서 가능한 특유의 문화인걸까.

스페인 여느 도시 골목골목 굽이마다 있던 이런 작은 광장들이 그립다.

 

모쪼록 정말 우리에게도 인생 이베리코 맛집으로 단숨에 등극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원래 블로그 주인의 뜻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게 상호명을 우리만 또 알고있기로 했다.

다음에 언젠가 세비야에 다시 갔을때 한국인들로 북적이지 않으면 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ㅋㅋㅋ

낭만...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별거 아닌 그냥 잘 만들어진 저녁식사 하나로도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행복으로 가득찰 수 있는걸까.

우리만 그런것도 아닌것같았다.

 

한낮의 열기 아래 한산하던 골목들은 이제 제법 얼굴이 붉게 오른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 얼굴 하나하나에는 웃음과 열정이 가득했다.

또 다시 헌법의 거리

 

숙소에 가서 마실 맥주를 사둔터라 얼른 가서 탄산 터지는 소리를 듣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첫 저녁이니만큼 야경을 조금만 둘러보기로 했다.

결국은 걷다걷다 스페인광장까지 다시 발이 닿아버렸다 ㅋㅋ

 

야경이 아름답긴 했는데,

스페인은 확실히 태양의 나라인가보다.

스페인광장은 일말 고민의 여지 없이 햇빛아래 빛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그래도 예쁘긴 해...

 

그리고 우리는 아까 그 옥상에 올라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바라보며

캔맥주를 연신 까대었다.

 

세비야가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