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그라나다 ①] 알함브라를 지키는 붉은 요새 알카사바와, 지엄한 황명이 낳은 미운오리새끼 카를5세 궁전

지난 포스팅 이후로 알게모르게 부담감을 좀 가졌던지 시간은 충분했는데도

그라나다 일기를 쓰는걸 차일피일 미루다가 겨우 오늘에서야 사진을 골라냈다.

치즈 사진으로 그라나다 포스팅을 시작할뻔하다가 황급히 하나 추가했다

 

부담을 갖게된 까닭은 아무래도 주변 지인들의 기대도 한 몫 하긴 했다마는

나 자신도 그라나다에서의 기억을 어떻게 풀어내볼지 고민을 해봤을때

(구태여 추억이라 쓰고싶건만 그러기엔 너무 가까운 과거)

막상 내가 그곳에서 품었던 상당한 감동과 충격이 너무나 직선적인지라 이게 포스팅이 될까 싶었다.

정말 그 안에서 내 머릿속에는 그저... '와 대단하다' '너무나도 아름답다' '경이롭다' 정도의 

일차원적인 감탄사들로만 가득 채워져있었던것 같다.

 

아무래도 그라나다를 나보다 먼저 방문했던 여행선배들도 비슷한 감정이었던지,

알함브라 포스팅이 기대된다고 개인적으로 연락준 사람이 둘 씩이나 있었다.

그냥 평소처럼 내 발걸음이 닿은 순서대로 이 하얀 바탕에 글자를 채워나가긴 하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달라고 그 둘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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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사실 알함브라 대단하다고들 읊어대는걸 워낙 많이 들어본지라 

그 피로도에서 오는 '뭐,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할라고' 하는 마음과 더불어

또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도 못하는 콧대높은 관광지라는 불편함에 더해져서 

아주 거대한 기대까지는 미뤄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오히려 그라나다의 훌륭한 타파스바 문화를 더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너무 방심한나머지 감동이 더 예리하게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이거는 서비스, 호프집에서 나오는 뻥튀기 느낌이다

 

그 그라나다의(말더듬은거 아님) 훌륭한 타파스바 문화라는거는

바로 맥주를 시키면 그날그날 가게 사정에 맞는 타파스 한 접시를 내어주는걸 말한다.

원래 안달루시아의 타파스바가 다 이랬다고 하는데 인심이 옛날같지 않고 

이제는 여기 그라나다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미풍양속.

 

다만, 주방장 마음대로 호의로 내어주는거다 보니 날마다 퀄리티 차이는 조금 있다.

샌딩투어를 마치고 배낭과 함께 숙소에 널부러져있다가

이 미풍양속을 즐기기 위해 기어이 기어나간 우리에게 찾아온 무작위 안주는 바로 치즈와 올리브였다.

 

에... 고작? 

인종차별 아니야 이거? 생각하면서 주변 테이블을 보니 오늘은 다 이 세팅이다.

 

그래도 진짜 놀라운건 '고작' 저 치즈와 올리브가 엄청나게 맛있었다는것.

어떤 날에는 고기요리가 나온다는데, 육류와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 수 있는 퀄리티긴 했다...

독일에서 수입해먹는 올리브도 거진 같은 스페인산인데 확실히 본토의 맛이 남다르긴 하다.

(나는 올리브를 엄청 좋아해서 일주일에 500g 통 한 개씩은 먹는다)

뭐 메뉴에 김치 뭐시기라고 써있었다

 

메뉴에 김치 뭐시기라 써있길래 속는셈 치고 주문해본 메뉴한테는 정말 속았다.

김치가 들어있다기보다 김치 베이스로 뭔가 소스를 만든것같았는데, 

속기는 했는데 모쪼록 맛있긴 맛있었다 ㅋㅋㅋ 따로 시킨 고기요리보다 맛있는게 함정

대체로 고기는 그냥 고기맛

 

고기요리는 세비야에서 먹은 이베리코가 너무 압도적이었기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이후로 그것보다 맛있는 고기를 먹어보지를 못했다.

 

썩 괜찮았던 이 타파스 맛집도 일단은 지도를 남겨둔다.

Los Manueles Monjas del Carmen 이라는 집인데,

(나름) 큰길가에 있는 Los Manueles Reyes Catolicos 라는 집과 같은 음식점이다.

작은 골목길 귀퉁이에 있어서 조금 더 차분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모쪼록, 그라나다에 입성하자마자 가장 먼저 치른 이벤트는 저녁식사였음을 밝히고 ... 

그 다음 행사 역시 숙소 소파에 반쯤 누운채로 미리 사둔 맥주와 올리브, 감자칩 안주 섭취였다.

그렇게 온 저녁 내내 먹기만 하고도 바로 누워서 숙면을 취했다는게 지금와서는 믿겨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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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잤더니 새벽녘 공기가 제법 쌀쌀해서 조금 일찍 깨어났다.

제아무리 뜨거운 이베리아 반도의 태양이라고 해도 

자취를 감춘 후에야 슬금슬금 내려오는 시에라 네바다의 찬 기운까지는 별 수 없나보다. 

 

따뜻한 온수 아래 서있는걸 좋아하는 내게 모처럼 완벽한 아침을 맞을 조건이 갖춰졌다.

일찍도 일어났거니와 지금까지와는 달리 찬 아침공기 덕분에 온수꼭지를 한껏 왼쪽으로 젖혔다.

어이없기도 하지... 추위가 싫어서 스페인으로 도망치다시피 왔으면서

결국 아침공기가 차가와서 행복함을 느껴버리다니... ㅎㅎ

사람 사는게 다 그런건지 싫은면과 좋은 것들이 함께 붙어다닌다.

미처 해가 다 떠오르지 않은 그라나다의 골목길

 

그나저나 정말 운이 좋게도 그라나다 도착 일주일 전에서야 처음 들어가본 티켓예약 사이트에서

동행분이 나스리 궁전 입장권을 따냈는데(일주일 전이면 사실상 구하기 어려운 시기라고 함)

그야말로 말 그대로 천사의 옷깃에 스치기라도 한듯했다.

 

그 입장시간이 오전 열시였기에 미리 올라가서 조금 둘러보기로 하고 여덟시 이른 아침에 거리로 나섰다.

아직도 해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미처 다 넘어오지 못한 탓에 골목은 그늘에 잠겨있다.

 

숙소 위치를 참 잘잡은것 같다.

집 바로 옆 골목길을 돌아 올라갔더니 금방 알함브라로 올라가는 길이 나왔다.

 

골목길의 끝에 알함브라의 경계임을 알리는 개선문같이 생긴 관문이 하나 나왔다.

그라나다의 문이라고 이름붙여진 돌덩이는 알함브라의 원래 주인인 나스리 왕조 시절에는 없던거다.

카를5세 시, 그러니깐 이 도시가 가톨릭 세력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성문인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골목길 끝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어색한 자세로 버티고 서있는 느낌이다.

 

없는 편이 더 조화로웠을것같은데 말이지... 

여기부터는 (제법) 온전한 이슬람의 유적이다

 

숲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니 정의의 문이 나(오기 전에 숨이 좀 찼다)왔다.

이 성문부터는 나름대로 온전한 나스리 왕조의 위대한 유적에 해당된다.

나름대로 온전할 수 있던 이유는 레콩키스타의 종결자 이사벨라 여왕 부부가 알함브라를 아꼈기 때문이다.

 

여왕은 이 성을 함락시킬때 포 사격을 가하는걸 금했는데, 

이 아름다운 무어인의 성채를 상처없이 온전한 상태로 가져오고 싶었다.

레콩키스타가 일종의 종교전쟁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건축물, 특히 그 경이로운 장식들이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던 비결은 이사벨과 페르디난트가 인류의 위대한 창조물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에반해 먼 훗날 못배워먹은 프랑스놈들은 나폴레옹전쟁 시절 알함브라를 약탈한다)

 

정의의 문에는 이교도 문화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약간의 승리의 표식이 남아있긴 하다.

성문 중단부를 보면 아랍어 글귀가 새겨져있는데

"이 땅 무슬림들의 꺼지지않는 번영" 이라고 한다.

여왕님은 이 글자를 지우는 대신 그 바로 위에 성모님을 모셔두는 편을 택했다(이게 멋이지).

알함브라 궁전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 일명 포도의 문이다.

 

열쇠구멍 모양의 성문에 난 또 하나의 문을 비집고 들어가니 

성채를 지키는 병사들이 앉아서 쉬던 구불구불한 공간을 통과해서 성 안쪽 공간이 나왔다.

언덕을 조금 더 쭉 올라서면 왼편으로는 군사들의 주둔지인 '알카사바'가,

오른편으로는 알함브라의 궁전 지대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있다.

 

문 이름은 포도의 문인데, 그 유래를 분명히 선생님이 잘 설명해줬는데 기억이 안난다.

역시 설명은 들어봐야 나중에까지는 썩 쓸모가 없다니깐...

아, 세비야에서 투어라이브를 들었던게 나름 마음에 들어서 여기에서도 같은 어플로 오디오가이드를 들었다.

 

이번 선생님도 상당히 괜찮게 설명을 해주셨는데, 원래는 대면 가이드 투어도 한다고 했다.

참 좋은 세상이 아닐수가 없다. 

이렇게 가이드 투어마저 이제 비대면으로 값싸게 할 수 있다는게 말이다.

 

지금은 기념품상점 건물의 한쪽 귀퉁이일 뿐인 포도의 문은 일단 제쳐두고

우리는 나스리 궁전 입장까지 남은 한 시간동안 알카사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선생님 추천사항이기도 했는데, 해가 미처 다 떠오르기 전의 알카사바가 나름 운치있다고 하셨다.

알카사바의 입구

 

알카사바에 들어가려면 여권이 필요하다.

알함브라 궁전 곳곳에서 신분증 검사(?)가 이루어지는데 알카사바가 그 첫 지점이다.

 

알카사바는 흙을 구워만든 벽돌 요새다.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알함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섹터라고 했다.

원래는 위 사진에 있는 성채 앞 공간이 이런 평지가 아니라 계곡이어서

알함브라와 알카사바가 분리되어있었다고 하는데,

가톨릭함락군이 나중에 군사요새를 접수했을때 급수 문제가 심해서 

물 저장고를 만들면서 두 지역을 이어주는 지금의 앞마당을 설치했다고 한다.

 

지금은 알함브라를 구경하다가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의 쉼터이자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먹을 수 있는 조그만 가판대 카페가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알카사바에 들어선 직후

 

알카사바에 들어서면 요새의 성벽 높이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아주 조금 올라갔을 뿐인데 이미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제법 달라지기 시작한다.

특히, 떠오르는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성채의 동쪽 벽이 빛을 발하는 모습이 장관인데,

비로소 이 궁전의 이름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것' 이라는 뜻이란다.

이제서야 태양이 알함브라의 뒷산을 넘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대편 하늘을 보니 드디어 나스리 궁전 뒷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조만간 다시 태양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겠지 :D

헤네랄리페의 끝자락도 살짝 보인다

 

시선을 살짝 옮기면 헤네랄리페의 끝자락도 살짝 보인다.

저쪽 골짜기는 조금 먼저 햇살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왕가의 휴식처가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북쪽으로는 레콩키스타로부터 시일이 좀(500년?) 흐른 후에

다시 돌아온 무슬림들이 모여살던 동네 '알바이신'이 보이는데

교묘하게 알바이신 아래쪽으로는 아직 그늘이었다.

알바이신 지구의 모습, 그라나다는 아직 반쯤 그늘져있다

 

군사 요새였던 알카사바에는 곳곳에 군사용 탑이 설치되어있는데 

오늘날에는 각 방향별로 훌륭한 뷰를 자랑하는 전망대들이 되어있다.

그래서 좋았다.

수시로 찾아오는 기회, 세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그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직 아랫동네도 반즈음은 그늘 속에 머물러있었다.

그늘진걸 보니 서쪽 전망대였나보다

 

난간 근처에 우두커니 서서 세상에 감탄하는 여행객들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옛날엔 정반대였는데 요즘은 사람이 있어야 풍경이 완성된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 시절엔 왜 사람이 그렇게 거슬렸던거지?

 

그나저나 세상에 핸드폰 렌즈를 들이미는 내 그림자도 한켠에서 자기주장을 좀 펼치고 있다 :D

성채 외벽을 따라 옛 진입로도 남아있다

 

바로 가까운 발치에는 성채 외벽을 따라 알카사바로 들어오는 옛 진입로도 남아있었다.

이방인으로서 이런 요새에 들어온다는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같은 성격이라면 이번에도 사지 멀쩡히 걸어 나가면 좋겠다는 소망 정도만 품게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새 안에는 무서운 아저씨들도 좀 살았던것같다

 

알카사바 안뜰에는 옛 집터들이 좀 남아있다.

요새답게 그 안에 병사들이 좀 우글거렸나 싶은데, 지휘관들의 집이었다는것 같다.

하긴, 성 안에 집이 있다는게 그제나 지금이나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겠지.

 

한쪽으로는 지하감옥으로 내려가는 통로도 남아있었는데

따지고보면 거기도 누군가의 주거시설이긴 한가 ㅋㅋㅋ

 

그나저나 알함브라 궁전 안 메디나에도 귀족들의 저택 터가 은근 남아있다.

 

오래지 않아 또 다른 망루, 사방이 다 트여있어서 주 전망대 느낌이 나는 

벨라의 탑(Torre de la Vela)에 올라왔다.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시야에 눈이 정말 행복한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어딘가에 마음을 빼앗긴 아저씨 한 분

 

한 여행객 아저씨는 망루에 오르자마자부터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뷰파인더에 눈을 얹어놓고선 혼신의 힘을 다해 렌즈를 간섭하는 햇볕을 막아내고 있었다.

나도 아저씨의 렌즈가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되고 말았다.

시에라네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도시뷰였다

 

아저씨는 시에라 네바다 방향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알함브라의 푸른 나무들 뒤로 빼꼼 보이는 알함브라빛 붉은 건물과

그 윗단에 살포시 깔린 구름 하며, 너무나 당연히도 구름 위로 솟아있는 시에라 네바다가 함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붉은 건물은 알함브라 팰리스 호텔, 5성급이라 그런지 외관이 훌륭하다)

알바이신 언덕배기는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찬찬히 다시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알바이신이 보인다.

아주 미세하게 각도가 바뀌었을 뿐인데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른것도 같다.

사람도 왼쪽얼굴 오른쪽얼굴 가려서 보여주는 마당에, 

더 굴곡지고 다양한 면을 가진 도시의 얼굴도 느낌이 달라지는게 이상할건 없다.

그라나다 대성당의 모습

 

지금까지와 달리 처음으로 여기 망루에서 서쪽 시야가 열렸다.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온건 우두커니 약간 펑퍼짐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라나다 대성당이다.

이사벨 여왕의 지시로 건축하기 시작한게 아직도 종탑은 완공되지 않은 느긋한 녀석이기도 하고,

알함브라를 너무나 사랑했던 여왕과 남편분이 지금도 누워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번 가볼까 싶기도 하지만, 분명 입장료를 받을것임이 뻔해서 아직까지는 미정 :D

정 심심하면 가보기로 한다.

알카사바에서 나가는 길목, 정원에 진한 아름다움이 있다

 

망루에서 나와 출구쪽으로 향하는 길에 차분하면서도 진한 아름다움을 품은 정원을 만났다.

Jardin de los Adarves 성벽의 정원이라는 정직한 이름이 붙은 곳이었는데

요새 위에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다.

감동적일만큼 차분하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는데 뭔가 사진이 그만큼은 못담아낸것같아 아쉽네...

 

남쪽에 면한 이 정원이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어떻게 빛날지 모르겠지만

아침녘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서는 그 진함마저 포근했다.

안어울려 안어울려...

 

알카사바를 빠져나오고 나서도 나사리 궁전 입장까지 시간이 조금 비었다.

내친김에 바로 지척에 있는 카를로스 5세 궁전도 한 번 구경해보기로 했다.

나스리 궁전 입구와 붙어있는 이유는

이 건물이 나스리 궁전의 주궁 코마레스(Comares) 일부를 헐어낸 자리에 들어선 네모네모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과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시칠리아, 예루살렘, 헝가리,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마요르카,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지브롤터, 카라니아, 인도양군도, 알헤시아의 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브루군트, 로트링엔, 브라반트, 슈타이어, 케른텐, 룩셈부르크....

이즈음에서 그만하자... 정확히 이 아저씨의 직함의 반절 지점에서 끊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이사벨-페르디난트 부부왕이고 친할아버지가 막시밀리안 1세 황제라 이렇다)

 

여하튼 이 전쟁광 금수저 카를5세 황제는 결혼을 세비야에서 했는데 

신부는 할머니와 이름이 같은 이자벨이지만 포르투갈 공주님이셨다.

세비야에서 신혼생활을 좀 하다가 알람브라 궁전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자기 외할머니도 그랬고 나도 그랬듯 이 양반도 알함브라가 애지간치 마음에 들었나본데,

문제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기에 '나도 궁전 하나 지을래' 선언을 해버린다.

(할머니가 들으면 볼기짝을 사정없이 내리쳤을텐데)

 

공간이 어디 뭐 있나... 하나 헐어야지... 그렇게 궁전 한 귀퉁이가 헐리고 

(아름답긴 하지만) 이슬람 궁전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이 르네상스 네모 케이크가 들어선다.

뭐, 이거 말고도 나스리 주궁에도 조금 변형을 가하긴 한 할머니말 안듣는 망측한 손자셨다.

원형경기장의 형태를 차용했다

 

사실 스페인이 유럽국가라는걸 감안하면 이런 건물을 지으라고 명했다고 해서 

꼭 그렇게 비난할수는 없기는 하다마는... 그냥 아쉽다는거지 뭐...

나도 내 집이 재건축된다하면 물개박수를 치긴 할것같은데,

그럼에도 도시의 원래 텍스트가 주는 고유한 아름다움이란게 있기는 있다.

 

여하튼, 이 건축물 자체는 매우 훌륭하고 나도 내 동행도 매력에 흠뻑 젖었다.

외관과 달리 그 내부는 곡선과 규칙성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카를 5세의 치하중에 이탈리아에서 한껏 꽃피고 있던 르네상스의 훌륭한 자식이긴 하다.

2층 회랑이 빛을 받으면 한없이 포근해진다

 

2층 회랑에도 올라갈 수 있는데, 그 복도에 비스듬히 햇살이 들어오면

차갑게만 느껴지던 돌에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포근함이 한가득 차오른다.

저런 양식을 뭐라고 하는지는 건축알못인 나야 알 길이 없지만 천장 장식도 아주 기품있고 말이다.

 

결국 카를5세가 여기를 다시 찾지는 못했던거로 알고있다.

나는 조만간 다시 가내고 말건데, 

그렇게 되면 내가 저 거대한 명함을 가진 사내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 되는거겠지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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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스리 궁전에 들어갈 차례인데,

잠깐 쉬어가는 편이 좋겠다.

 

P.S. 나스리 궁전을 제외하면 알카사바, 카를로스5세궁전, 헤네랄리페 모두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맞겠지...?).  나스리 예약에 실패했다고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적어도 이 공간들이라도 와서 거닐어볼 가치는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