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그라나다 ②] 그 자신의 왕국보다 소중했던 술탄의 궁전, 알함브라

오늘날 나스리 궁의 입구는 좁다

 

드디어 입장시간이 되어 무어인들의 궁전에 들어가려 한다.

신분이 사라지고, 관광이 보편화된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 건물이 아직 궁전으로 기능하던 시절에 확률상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우리들이 

술탄이 계신 궁전에 이렇게 드나든다는게 상상이나 가능한 일이었겠어? ㅎㅎ

 

물론 오늘날에도 '예약' 이라는 지독한 절차에 성공한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나스리 궁전이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동행님...

그림같은 아랍어는 그 자체로 장식이 된다

 

이제와서 보니 나사리궁 안에서 사진을 생각보다 거의 안남겼다.

역시 끊임없이 감탄하느라 머릿속이 새햐얘졌기 때문인것같다...

 

나를 그토록 놀라게 했던 것들은 주로 벽과 천장의 장식들이었는데, 

벽들을 수놓은건 이슬람 특유의 끝없이 이어지는 기하학 무늬들과,  

그 자체로도 이미 그림같은 아랍어 경구들이었다.

 

대부분 술탄의 힘 혹은 신에 대한 찬미를 담은 내용이라고 했다.

저 수많은 곡선들로 이루어진 글자를 어떻게 알아보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알라 이외 다른 정복자는 없음이라'

나스르 왕국의 문장에 적힌 글귀이다.

안뜰이 아담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나스리 궁을 구경하는데 한 시간 반을 썼는데, 

나스리 궁전이 규모면에서는 그렇게 거대하지 않은걸 감안하면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공간 하나하나를 음미하다보면 앞으로 진행하는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스리 왕조의 건축가들은 시선이 닿는 그 어느 곳이든간에 장식없이 남겨두는 법이 없었다.

(간혹 밍밍한 회벽이 그대로 나오기도 하는데 복원이 덜된거로 보인다)

 

그나저나 (얼굴은 뵌 적 없지만) 훌륭하신 가이드 선생님이 모든 공간을 다 설명해주셨는데

기가막히게도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력이란게 고작 세 달을 못가다니 너무 속상한걸?  ㅋㅋㅋ

(이 건물은 지금 700년 가까이 버티고 섰는데 ㅠㅠ)

알함브라를 상징하는 공간

 

사람들에 치이며 나아가다 보니 알함브라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에 도달했다.

(뒤로 보이는 카를로스 5세의 궁전이 조금 거슬린다... 조선총독부가 저런 느낌이었을까)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Comares)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정 한가운데에 가둬둔 수반과 그 수면에 반사되는 나스리의 아름다운 광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들로 정원 반대편이 복작복작 하다.

바로 이 모습

 

물론 나도 참을 수 없지... ㅎㅎ

너무 근데 살면서 아름답게 잘 가다듬어진 작가들의 사진을 많이 봐서 그런가

오히려 이 장면에서는 내 사진에 크게 애착이 가고 그러진 않는다 :D

 

모쪼록, 이 맞은편 끝에는 술탄이 앉아있는 접견실이 있었는데

외빈들은 이 정원을 거쳐서 들어왔다고 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정적인 이곳 정원에 감탄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한순간 묘한 어둠에 잠긴 접견실에 닿게 되는데

그 사신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접견실 중앙에 앉아 세상을 노려보는 술탄이 보였을거다.

술탄의 머리 위로는 우주가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 술탄 위로는 우주가 펼쳐져있는듯 하다.

그 아래로는 사방으로 난 창들로부터 햇빛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는데,

이렇게 어둠속에서 술탄에게 비춰지는 후광으로 인해 외부인들은 술탄의 얼굴을 관찰할 수 없었다.

 

양쪽 벽으로는 일종의 석실같은 공간이 쭉 늘어서있는데,

그 안에는 술탄을 보좌하는 나스리 왕국의 지배계층들이 앉아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뒤로도 작은 창들이 나있어서 손님은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권위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다.

 

이 엄청난 권세의 공간에 얼마나 감탄했었는지 모른다...

사자의 중정은 가냘픈 열주에 의해 떠받들려있다

 

그 다음으로 만나게되는 공간은 사자의 중정인데,

안뜰 한가운데에 열두마리의 사자가 뿜어내는 분수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사자상들은 그라나다의 유대인 부족이 술탄에게 바친 선물이다.

 

하지만 사자상보다 눈길을 끄는건 단연코 정원을 떠받치는 가냘픈 열주들이라고 해야겠다.

저 가느다란 기둥들이 수백년동안 이 정원을 지탱하고 있었다는게 믿기 어렵다.

기둥 위로는 역시 사람이 직접 조각했다는게 믿기 어려운 세공이 빼곡하다.

사실 이런 아름다운 세공들이 한 공간에서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사이사이에도 온통 가득해서

이렇게 포인트만 집어서 일기로 남기는게 거짓말하는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이슬람 건축은 정말 세련되다...

 

곳곳에 서있는 기둥들을 자세히 보면 각기 숫자가 다르다.

어떤 곳은 한 개, 어떤 곳은 두 개, 경우에 따라서 세개짜리도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황금비를 사용했다고 한다.  

유럽의 건축이 규칙성을 선호하는 것과 정말 대조적이다.

이렇게나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 이슬람 문화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공격성을 띄며 쇠락했을까.

아벤세라헤스의 방

두 자매의 방

 

사자의 중정은 중앙정원 답게 다른 많은 방들로 이어지는데

정말 (좋은 의미에서)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공간이 정원을 사이에두고 마주보고있다.

 

바로 아벤세라헤스의 방과(Sala de los Abencerrajes) 두 자매의 방(Sala dos Hermanas).

종류석이 매달린것같은 모양에 종류석의 방들로도 불리는 곳이다. 

아니... 사람이 이런 장식을 창조해낸다는게 가능한거였나... 인간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양식을 모카라베(Mocarabe, 무카르나스) 양식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있을적에 동굴에 피난생활을 했음을 표현하는 장식기법이다.

린다라하 정원이 보이면 나스리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온거다

 

두 자매의 방의 북쪽 끝에 난 창밖으로 중정이 하나 더 보인다.

린다라하(Lindaraja) 이름의 이 정원이 보이면 이제 나스리와 작별할 시간이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원래는 이 창을 통해서는 시야에 걸리는게 없이 건너편 언덕배기가 쭉 펼쳐졌다고 한다.

 

다만, 지금은 정원과 그 너머에 있는 카를로스5세의 방으로 시야가 막혀있는데

카를5세가 여기로 신혼여행을 올적에 이교도의 방에 투숙하고싶지 않아 투정을 부린 나머지

부랴부랴 건물을 새로 증축한 부분이라고 한다.

이 창 너머로 세상이 바로 보였으면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지가 궁금해 아쉽다.

(카를5세는 정말... 아마 저승에서 이사벨 할매랑 술탄들한테 엄청 깨졌을것같다)

약간 북쪽으로 후퇴한 궁전의 끝

 

지금은 그 대신 성의 끝자락이 북쪽으로 조금 후퇴해서 이런 회랑에서 건너산을 바라볼 수 있다.

그 방향은 알바이신쪽인데, 훗날 돌아온 아랍인들은 그래도 알함브라를 바라보며 살긴 했다.

 

이 회랑과 이어지는 카를로스5세의 방은 '워싱턴 어빙'의 방이라고도 불린다.

워싱턴 어빙은 조금씩 세월에 허물어져가던 알함브라 궁전을 다시 세상에 알려낸 장본인이다.

미국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그는 여기 이 방에 머물면서 'Tales of the Alhambra'를 집필했고,

그 덕분에 알함브라가 유명세를 타면서 다시 제 모습을 살려내려는 노력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방 한켠에는 그를 위한 기념석판이 박혀있다.

린다라하 정원이 그래도 아름답긴 하다

 

이 방을 끝으로 린다라하 정원으로 내려가게되는데 

원래 궁전의 일부가 아니었다는걸 의식하지 않고 보면 그래도 아름다운 정원이긴 하다.

남부 스페인의 싱그러움이 잘 녹아있는 쉼터다.

빨간 꽃이 강렬하니 스페인과 잘 어울린다

 

이 정원에서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다음에 다시 그라나다를 찾기 전까지는 나스리에 돌아올 수 없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컸다.

다시 발걸음을 거꾸로 돌려 이 비밀스러운 궁전을 한 번만 다시 돌아보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건 둘째치더라도 감탄하느라 너무 에너지를 많이 썼는지 사실 배가 조금 고파왔다.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에 마침표가 찍힌 후, 

나스르의 마지막 술탄 보압딜은 그라나다에서 추방되어 떠나는 길에

어느 한 언덕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궁전을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것이 더없이 슬프구나"

 

그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이 어쩐지 이해가 되는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