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산책]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간 퓌어스텐펠트 나들이

파란 하늘은 귀한것이거늘...

 

9월 중순의 일요일이었을거다.

지구가 정말 많이 아프긴 한건지 

아직 9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11월 날씨를 가져다가 한동안 엎어놓는 바람에

정신 나갈듯한 괴로움속에 살고있었을 무렵이다.

 

좀 춥다고 무슨 정신까지 나가랴마는

독일의 겨울을 겪어본 사람은 어쩌면 마음으로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 우중충하고 음울한 구름막을 생각하면

아무리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마의 11월이 오기전에 아름다운 날씨를 즐겨야하거늘

 

이 소중한 초가을에 한파가 찾아온다면

당장 내 뼈를 파고드는 한기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겨울날 (심적) 준비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있다는데서 오는 마음의 절규와 억울함에 있다.

절망적이었는데 말이다

 

비가 오면서 시작된 저 일주일이 시작되던 월요일

무언가 심상치않음을 느낀 나는 일기예보를 보고 할 말을 잃었었다.

기온이야 그렇다 쳐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비만오는건 어쩌라는건지...

 

심지어 그 주 내내 정말 일기예보는 기가막히게 정확해서

말 그대로 매일매일 비가 쏟아졌다.

(9월에 난방을 키게될줄이야... 지금도 잘 안트는데)

지구도 이건 좀 너무했지 싶었는지 맘을 바꿨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지구라는 친구가 자기가 세입자한테 좀 너무했다 싶었는지

일요일에 맑은 하늘을 선물해주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토요일 밤에 잠들때 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지X맞게 난리를 피우길래 반신반의 했는데

(모처럼 다음날 놀이공원으로 현장학습나가는 중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게 어인일인지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세상이 모처럼 햇살이라는거에 빛나고있었다.

 

나가자.

무조건 나가야한다.

그런데 어디로...?

(그런 멍청한질문을 했다니... 햇빛만 있다면 어디든 따라가면 되지)

 

솔직히 비가 잠시 멎을거라는 예보를 믿지 않았어서

마땅히 목적지도 준비해두지 않았고

더군다나 오후에는 결국엔 또 비예보가 있는터라 기차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긴 억울했다.

 

그래서 떠올린데가 결국은 또 이름이 긴 그곳.

아름다운 성당과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매주 나를 기다리는곳,

퓌어스텔펠트브룩(Fürstenfeldbruck) 에 다시 가보기로 결정했다.

2024.09.02 - [산책하다] - [여덟 번째 산책] 퓌어스텐펠트 수도원 그리고 암퍼

Berg am Laim 역 통로

 

마침 쯔비셴을 하나 찾아 들어가있던 참이라(드디어 호텔생활 청산)

S-Bahn 타러가는 길도 한 번 익혀두면 좋을것같았다.

* 쯔비셴(zwischen) 이라는 단어는 영역하면 between 인데, 주거 분야에서 쓰면 어떤 집의 거주자가 특정 시간동안(장기출장, 장기휴가 등) 자기 집에 살지 않게되어서 그 사이에 다른 세입자를 받는 거주 형태를 얘기한다

 

Berg am Laim이라는 역에서 S4를 잡아탔다.

무려 환승없이 한 번에 FFB로 데려다주는 노선이다... 

(마음같아선 내 집 깃발 꽂아버리고싶은데)

구로역 느낌 물씬 풍기는 Leuchtenbergring 합류선

 

머잖아 뮌헨 동역을 지나면 S-Bahn도 지하구간을 달릴거기 때문에

그전에 1초라도 더 열린 하늘을 즐기고싶었다.

모처럼 보는 파란색 바깥풍경이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다 :D

 

비가 지난 밤까지도 열심히 하늘을 씻어낸 덕분에

구름이 좀 끼었을지언정 저 멀리까지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물론 기온은 낮아서 춥기는 앵간히 추웠지만)

 

제일 환상적인건 맑은 (그리고 차가운) 공기가 폐를 휘젓는게 오롯이 느껴진다는거다.

잠깐 삼천포를 들러보면

뮌헨에 오래 산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려면

여기 공기 질에 대한 대화를 살짝 해보면 된다.

 

대부분의 뉴비들은 뮌헨이라는 곳이 도심지의 공기 질도 환상적이라고 극찬을 하지만

여기 원주민들은 생각이 좀 다르다.

도심지역의 대기오염에 상당히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어학당 선생님은 대기오염+산소농도 측정 기능이 있는 기계를 들고다닐 정도다.

 

서울에 한 번 살아봐야되는데 말이다...

로이시텐베르크링 역 모습, 도시 교외지역 느낌이 물씬 난다

 

음... 분명 S4는 한 번에 가는 노선이 맞긴 한데

하필 동역까지만 가는 요상한 편성에 당첨되는 바람에

Leuchtenbergring에 미리 내려서 잠깐 다음 기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이지 미사 시작시간을 맞춰 다니는건 내 팔자에 없나보다

오늘은 정말 정시도착을 뛰어넘어서 미리 도착하게끔 출발했는데

이렇게 뮌헨시가 나서서 20분을 추가해주다니 

조금 억울하다.

지난번과 같은 길이지만 사람이 없다

 

기차를 내렸다.

지난번에는 동남아에 온것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인도계 분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같은 길을 내려가는 동안 어떤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다.

WHY NOT

 

사람 대신 지난번에는 그냥 지나쳤던 이정표를 발견했는데

퓌어스텐펠트로 가는 숲길이라고 써있었다.

Why not... 

 

목적지가 같다면야 가보지 않은 길이 더 좋지 :D

여길 일단 지나가야한다

 

일단은 철길 아래로 난 개구멍을 먼저 지나야 한다.

센과 치히로처럼 저 터널을 지났을때 김나는 아시아 음식이 펼쳐져있으면

과연 나는 참을 수 있을까...

독일음식이라면 참아볼법도 한데 ㅋㅋㅋ

 

숲은 정말 숲이다

 

독일 이정표는 거짓말을 하는 법이 잘 없어서

(제일 답답한게 길에 포트홀같은게 생겨서 문제가 생기면 길을 차단시켜버리고 인근 동네에 길이 차단되었다는 표지판을 설치하고다닌다. 한국이었으면 그 사이에 이미 문제를 해결했을거다...)

애니메이션에서 처럼 낯선 마을이 나오지는 않았다만 

정말 숲속 오솔길이 나왔다.

 

바이에른은 정말 물이 온갖 곳에서 솟아나는지

오솔길을 따라서 작은 도랑도 하나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숲길의 정체

 

여기에 무슨 사람이 있겠냐 싶은데

반려견과 산책하는 여자분 한 명과 조깅뛰는 아저씨 한 명과 교차해 지나갔다.

그리고 바닥에서 20센트 동전도 하나 주웠다.

너는 봉헌금이 되려므나!

철길이 가까워 맘에들었던 숲길

 

수도원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 무렵 오른편 수풀에 나무가 잦아들더니

철길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가만 귀를 기울여보니 쇠의 작은 비명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부터 열차가 맹렬하게 달려오고있음을 미리 소리쳐 외치는 파발같은 소리다.

삼촌뻘 되는 열차가 지나다닌다

그러고보면 음속이란게 빠르긴 빠른가보다.

금방 올것같은 기차는 제법 인내의 시간을 갖고서야 내 눈앞을 지나간다.

그 주인공은 봄바르디어 2층 데커를 끌고가는 111계 DB 기관차였는데

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생이니 동년배 내지는 막내삼촌뻘은 가는 친구다.

(친구라고 하자니 좀 버릇없는것도 같고)

 

교환학생때까지만 해도 아직도 DB 주력 기관차들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그래도 한 절반 정도는 고철 신세가 되어버렸단다.

머지않아 이 노선에서도 사라지고 말 노익장.

아까보다 좁은 개구멍

밤에는 이쪽 길은 쓰기 어렵겠다

 

수도원으로 나가려면 다시 철길을 질러야해서.

다시 한 번 개구멍을 지나가게 됐다.

 

아주 익숙한 풍경이 반겨준다.

이렇게 또 머릿속 지도가 요오만큼 넓어졌다 :D

역시 1, 2차대전 추모비가 맞았다

 

지난번에 부랴부랴 성당으로 가느라 정확히 뭔지는 못봤던 묘비는

역시나 1, 2차대전 추모비가 맞았다.

 

문구가 상당히 고급지게 쓰인것같다(독어 초보라 확신은 X)

unseren, in der Kriegsgefangenschaft verstorbenen Kameraden

'전쟁에 포로로잡혀 사그러져간 우리의 동료들에게'

 

조금 궁금한 지점은, 자기들이 잡아두었던 전쟁포로까지 묶어서 기리는건지

혹은 전쟁포로로 잡혀 죽었던 독일 병사들을 추모하는건지 여부인데

내 독어실력으로는 확신이 안선다.

어쩌면 비유적인 표현으로 전쟁이 그들을 집어삼켰다는 뜻일지도 모르겠고...

 

참 어려운게 독일어다.

익숙한 종탑이 보인다

 

다행이도 아직 미사 시작까지 2분이나 남아있었던거로 기억한다.

꼭 정각에 갈 필요는 없는거니깐 따로 뛰지는 않기로 했다.

호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복장을 하고 모인 사람들

 

무슨 날이었는지 수도원 안뜰에 사람들 한 무리가 옛 복장을 하고

단체사진을 찍고 있었다.

수도원이니 이상할것도 없지만 사제 한 분도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궁금하긴 해서 구경할까도 싶었는데

미사 시작 오르간소리가 들려와서 홀랑 성당으로 뛰어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2주정도 뒤에 있었던 옥토버페스트와 연관이 있을까도 싶다.

 

그러고보니 여기 수도원은 어쩌다가 맥주를 안만들게 된걸까!

막 미사가 끝난 FF 수도원 성당

 

미사는 여전히 알아듣기 어렵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한여름이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기온이 한 자리수로 내려온 덕분에 성당도 제법 쌀랑했다.

그래도 마침 내가 앉은쪽에 유리창을 지나온 햇살이 들어오고있어서

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햇빛을 따라 나도 조금씩 움직였다 :D

 

이나저나 다시 봐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성당이다...

오늘의 오르간 프로그램

 

그리고 언제나처럼 미사가 끝나고 파이프오르간 콘서트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함부르크에서 활동하는 오르가니스트를 초대하더니

오늘은 여기 퓌어스텐펠트 수도원 상주 연주자가 연주를 해줬다.

 

스타일이 상당히 달랐다.

지난번 남자분이 선곡부터 연주 스타일까지 조금 더 두터운 공간감을 선호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여자분은 선율 하나하나에 조금 더 집중하는 스타일이랄까.

 

오르간의 매력이 여기에 있는것같다.

건반도 많고(3층 건반에 바닥패달까지 있으니...) 

선택할 수 있는 음색 코드도 몇십개는 되니 

연주자에게 상당한 재량이 주어질것같다.

 

세 작곡가의 곡을 주욱 연주했는데

모두 주제선율을 변주하는 곡들이었다.

 

그렇게 구태여 여기까지 찾아온 주된 이유였던 오르간 연주는 잘 들었다.

지난주에는 현금이 없어서 그렇게 훌륭한 연주를 듣고도 

한 푼의 기부금도 낼 수 없었는데

오늘은 일부러 적당한 돈을 만들어서 왔다. 

평소에는 짠내나는 인간일지언정 음악에는 조금 관대한 편이다.

 

이 오르간 연주회가 다 좋은데 딱 하나가 아쉽다.

열한시 미사가 끝나고 열두시부터 시작되는 탓에 끝날때즈음 되면 너무 허기지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조금 배가 고파서 감정이입이 좀 되고있다)

수도원에 식당이 있긴 하지만

일요일에 먹겠다고 토요일에 아둥바둥 장을 한아름 봐온걸 생각하면 외식은 참게된다.

 

배가 고프니 얼른 기차를 타러 가보기로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 시간 뒤부터 다시 비예보가 있기도 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건 참 무서운 개념이다

 

돌아갈때도 숲길을 타기로 했다. 

열차시간이 빠듯한데 숲길이 마을길보다 조금 거리가 짧아서였다.

후... 근데 역 방향 말고 그 반대편으로 오르막 계단이 또 눈에 들어온다.

딱 저 만큼만 올라가보고싶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참는담.

결국 올라가고야 만 나무계단

 

이끌려서 오른 계단이었지만 특별한 풍경까지는 없었지만

평화로운 시골 들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탁 트인 시야에 더해 들판 군데군데 드리워진 구름 그림자가 더없이 한가로워보였다.

맑은건지 구름이 낀건지...

 

조금 묘한 분위기는 있었던게

분명히 세상이 맑고 화창하긴 한데 구름들이 무겁고 군데군데 회색빛이라 가벼운 느낌은 아니었다.

사진을 봐도 이게 밝다고 해야할지 어둡다고 해야할지 애매한 느낌이 있는데

맨 눈으로 봤을때도 정말 그랬었다 ㅋㅋㅋ

 

약간 시간을 더 쓰기로 했다.

새로운 들판을 발견하기도 했겠다 

기차는 그냥 20분 뒤에 올 다음녀석을 타고 구릉을 따라 조금 산책을 하기로!

MEC, 설마 저거도 모형기차 동호회 소유인거냐

 

아침에 지나온 개구멍 근처에 가니 FFB역 끄트머리와 산책길이

같은 눈높이에 놓였다.

 

거기에 당장 Opladen(도이치반 공식 폐차장)으로 보내도 이상할게 없는 열차들이 서있었다.

'원래같으면 오래된 열차가 서있네' 생각했겠지만

지난번에 란츠베르크를 다녀온 이후에 저런 열차가 뭔지 감이 생겼나보다 ㅋㅋㅋ

저거 분명히 모형기차 동호회 아저씨들거다 싶어서 보니

MEC 라고 써있다.

Model Eisenbahn 뭐시기겠구만 또 ㅋㅋㅋㅋ

2024.08.17 - [산책하다] - [다섯 번째 산책] 란츠베르크 암 레히 & 악마의 부엌

 

아니나다를까 MEC는 ModellEisenbahnClub Fürstenfeldbruck e.V. 의 약자였다.

모형기차 진짜 돈 많이드는 취미인데... 

부러운양반들이 여기 또있네...

산책을 끝낼 때

 

언덕길을 오르면서 산책이 끝나갈때까지도 하늘이 너무 화창했다.

진짜 한 시간 안에 비가 또 쏟아질 수가 있는거야? 라고 생각했거늘

 

기차가 뮌헨에 도착했을때는 정말 쏟고있었다.

내가 의심해서 뭔가 더 맹렬하게 오는 기분까지 들어버린다.

 

오히려 좋아.

잠깐의 햇살을 알차게 즐겼다는데서 오는 뿌듯함을 만끽하면서

면을 삶기 시작했다 :D

 

Das E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