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말라가] 항구도시 말라가에서의 휴식, 여행의 반환점을 돌아서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도 숱하게 흔들리는게 사람이다.

그저께만 하더라도 BRSO가 섬세하게 펼쳐내는 브람스 피아노협주곡에 선 채로(입석이었다) 몇 번을 휘청였고

어제는 마음의 준비 하나 없이 맞닥뜨린 번스타인의 말러 2번(1987) 피날레때문에 

저녁시간 이후로는 부활이라는 심오한 주제와 인간의 목소리가 지닌 위대한 힘에 관한 생각들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울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보통 말러 2번을 듣기 전에 마음을 조금 무디게 만들어놓곤 한다)

 

최근에 또 조금 흔들렸던게

독일어가 조금 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던 1월 초와 달리 

1월이 반환점을 돌아 끝으로 향해가기 시작할무렵부터 갑자기 독일어에 또 큰 벽이 느껴졌다.

어차피 공부도 잘 안잡히던거 글이라도 열심히 썼으면 좋았으련만

마음속에 평화가 차지하는 공간이 줄어든 만큼이나 글도 잘 안써졌었고,

그 덕분에 요즘 블로그 방문 빈도가 확 줄어버렸었다.

 

다행이 이번 흔들림도 여느때와 같이 금방 잦아들어서 

오늘 모처럼 다시 평온함을 가슴속에 가득 품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벌써 올해의 첫 번째 달이 고요하게 두 번째 달에 자리를 내어준 후다.

 

그리고 내 스페인 여행기도 이제 반환점을 돌아 남부의 마지막 도시를 향하려 한다.

---

한밤중에 기차를 탄 것 같지만

 

열차시간은 아침 07:29였다.

 

행선지는 말라가라는 귀에 잘 익지 않은 남부도시였는데

말라가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 도시 자체를 즐기려기보다는 

이 도시가 스페인 남부의 관문도시이자 교통의 요지이다보니,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는 항공편을 타러 들르기로 했다.

(보통 말라가에서 출발하는게 다른 곳에서 가는것보다 세 배 이상 가격대가 좋다)

 

세비야나 그라나다처럼 여러 밤을 할애하기엔 일정이 빠듯해서 대신 이른 아침기차를 타고 

딱 그 날 하루만 욕심부리지 않고 슬쩍 둘러보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었다.

 

아침 일곱시면 제아무리 10월중순 해가 짧은 뮌헨이라고 해도 

이미 태양이 프라우엔키르셰 첨탑 위에는 걸려있을 시간이건마는

지중해까지 내려와있는데도 이곳 스페인의 일곱시는 칠흙같은 어둠속에 잠겨있다.

(프랑코, 뭔 짓을 한거냐)

 

일찍 일어나면 마지막으로 알바이신에 한 번 올라서 

아침 첫 햇볕을 받아내는 알함브라를 마지막으로 돌아볼까도 고민했었는데

어차피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거라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하게되는 어둠이다.

 

스페인은 독일과 달리 승강장에 들어가기 전에 검표를 미리 거친다.

독일을 전반적으로 훨씬 좋아하긴 하지만 검표만큼은 나는 이게 더 좋다.

괜스레 이상하게 사람들의 양심에 맡겨놓고는 벌금을 걸고 게임을 하게끔 유혹하느니

깔끔하게 검사하고 타는편이 더 마음이 편하단말이지.

 

모쪼록 처음 타본 렌페는 내부시설도 정말 편하고 날렵했다.

옛날에 스페인에 왔었을때는 젊었어서 불편한줄도 모르고 버스로 그 넓은 땅을 누볐었지.

아홉시에는 그래도 동이 터있다

 

탈것에서의 정상적인 루틴(기절)을 수행하고 나서 마치 부활하듯 깨어났을때는 그래도 동이 튼 이후였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스페인 남부의 다소간 황량한 풍경이 즐비했다.

Estacion de Malaga Maria Zambrano

 

말라가는 정말이지 대도시였다.

유럽생활을 한 두어달만 하고 나면(베를린, 로마, 런던, 파리 제외) 완벽하게 시골쥐가 되어버리는데

말라가 역에 도착했을때 나랑 동행 모두는 말라가에게서 느낀 의외의 '대도시성'에 놀라버렸다.

 

당장 마리아 잠브라노 역에부터 깔끔하고 큼직한 아케이드가 있었고,

자그만한 전광판 한 개에 하루치 열차편이 모두 표시되어있던 그라나다와도 달리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전광판들로도 아직 오전의 열차일정도 소화하지 못해냈다.

---

말라가 알카사바와 히브랄파로 요새로 오르는 길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이 날씨에는 다소간 무거운 배낭을 매고 축축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사실 축축한건 언덕이 아니라 우리의 등짝이긴 했지만 :D

 

역 근처에 잡아놓은 에어비앤비는 오후부터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었고

짐이라도 좀 맡겨볼까 싶었지마는 신성한 주말 오전을 방해하는 파렴치한이 되고싶지는 않았음이다.

아침도 먹는둥 마는둥 커피 한잔으로 해결했던터라 많이 허기졌지만

스페인의 음식점들은 빨라야 열한시, 어지간하면 열두시는 지나가야 가게문을 슬슬 여는것같았다.

 

가만히 공원에 앉아서 그늘을 즐길까도 했지만

기왕 처음 마주하는 도시에서 숨쉬는데 널부러져 있더라도 높은 곳에라도 올라서 널려있기로 했다.

 

말라가 항구 바로 앞 야트마한 산에는 무어인들이 세운 요새 히브랄파로와 알카사바가 서있다.

다른곳들과 마찬가지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건 이들 이슬람의 건축물이다. 

 

어우... 그나저나 시에라네바다의 그늘아래서 남부 스페인의 더위와는 잠깐 시간을 가졌었던 내게

나무그늘 하나 없는 이 언덕길이 좀 지독하게 뜨겁긴 했다.

조금만 올라서도 풍경이 확실히 달라지는, 말라가는 항구도시다

속초같은 느낌도 좀 나고 그런다

 

그래도 등을 적시는 땀을 무릅쓰고 올라갈 가치가 있었다.

조금만 올라서도 풍경이 확실히 달라지는 이곳 말라가는 정말이지 항구도시다.

남국의 싱그러운 녹음 사이로 빛을 은은하게 튕겨내는 상앗빛 시청사와 그 뒷편 항구에 정박한 페리까지.

 

히브랄파로(Gibralfaro) 성 바로 직전의 전망대에는 벤치도 있고 나름의 나무그늘도 있어서

시원한 바닷바람에 금방 뽀송해진 덕분에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언덕배기에서는 투우장이 보인다

 

언덕 어느 지점즈음에 다다르면 건물들 사이로 갑자기 투우장이 내려다보인다.

물론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마는 여기 언덕에서보다 바로 옆 아파트들에서 더 적나라하게 보일거다.

투우장이 당연히 먼저 세워졌겠지?  :D

안방에서 투우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저 집들은 프리미엄이 붙을까? 

말라가의 거리는 넓고 쾌적하다

 

등에 짊어진 짐이 귀찮아서 히브랄파로 요새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 시원한 바람과 높은 곳에서의 전망을 즐기다 보니

애시당초 시간만 좀 보내려던 계획과 달리 은근히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토록 강하게 온몸 구석구석을 찔러대던 허기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던걸까)

 

말라가를 동서로 가르지르는 이 넓은 도로는 'Alameda Principal(메인 포플러나무길)' 이다.

찻길보다 양옆의 인도가 훨씬 더 널찍한 이 길을 따라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다.

나무그늘 사이사이마다 꽃집들이 역시 줄지어 서있는 달콤한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다시 기차역 방향으로 되짚어와 개울도 건너 거의 숙소에 다다랐을 무렵

동행분이 제법 유명한 스페인 햄버거 체인점이 있다해서 들러가기로 했다.

Goiko 라는 버거집이었는데 맛은 있었다마는 좀 많이 짜서... 

그뒤로 한동안은 바닷바람이 불어올때마다

마치 대관령 어딘가에 집게에 널려 나풀거리는 황태가 된 기분마저 들었다 : (

나를 황태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 버거

 

숙소에서는 호스트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줬다.

사실 의도한건 아니었다.

내가 황급히 예약한다고 호스트와 함께 집을 사용한다는 정보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극단내향인에게는 다소간 도전적인 하룻밤이 된 셈.

뭐 호스트가 있건 없건 숙소에 가자마자 짐을 끌러내고 한 시간이 넘도록 시에스타부터 즐긴 우리긴 하다.

---

말라가 항구의 차양은 고래 뼈처럼 생겼다

 

자고 일어나니 속이 더 짭쪼롬했다.

꿈속을 해메는(사실 꿈은 잘 안꾸는편) 동안 물을 안마셨더니 이제 출하해도 되겠다 싶을정도로 바짝 말라있었다.

물을 찾아서 바깥으로 나왔다.

 

마트에서 물 한 통을 사서 둘이 황급히 들이키고서는 다시 소금기 가득한 바닷가로 향한다 :D

말라겟다 해변(Playa la Malagueta)에서 산책을 좀 하다가 저녁을 먹을 계획이다.

참 단순한 일정이지 ...

 

말라가에 와서 한거라고는 숙소 체크인을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고

낮잠을 한 숨 달여내고 저녁먹는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말라가 내항

 

말라가는 전반적으로 그렇게 자극적이지는 않은 곳이다.

그렇다보니 지구 반대편 머나먼 곳에서 온 우리 한국인들은 말라가를 잘 찾지 않는다마는

유러피언들은 말라가를 제법 사랑하는것 같았다.

오전에 히브랄파로 성 아래에서 관광버스도 제법 봤었거니와 

가장 한 눈에 확 들어오는건 페리와 범선들이 자주 오간다는거다.

 

저 배는 아직도 돛을 좀 활용하는지 클리퍼처럼 사각돛을 잔뜩 달아뒀다.

그러고보니 큰 배 탄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언젠가 지중해 페리도 한 번은 즐겨봐야겠다.

말라게타 해변

 

항구를 가로질러 통과하니 드디어 말라게따 해변이 나왔다.

10월 초, 우리로 따지면 바닷물이 식어도 한참 식었을 이 계절에도 

여기 지중해의 태양은 수영을 허락할만큼 강력한지 아직도 해수욕이라는게 이루어지고있었다.

맙소사...

 

수영복을 챙겨올걸그랬나...

우리의 저녁식사

 

내친김에 바닷가에서 저녁까지 해결하기로 했다.

말라게따 해변에는 '치링기토(Chiringuito)' 라고 불리는 작은 식당들이 듬성듬성 떨어져있다.

치링기또는 그 자체로 해변가의 작은 식당이라는 뜻이다.

 

말라가의 전통적인 식당 형태이자 해산물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괜찮은 유형의 음식점인게

야자잎을 태워 훈연향을 입히는 생선요리를 맛볼 수 있다.

소스나 밀가루에 뒤덮히지 않고 온전하게 불을 견뎌낸 그런 생선요리를 맛본다는게 유럽에서 그리 쉽지 않다.

 

가격은 그렇게 착한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끼정도는 타파스에서 벗어나서 우아하게 먹어봄직도 하니깐 :D

그런 기조에 발맞춰서 모처럼 술도 맥주가 아니라 와인을 주문해 마셨다.

---

저녁을 먹는동안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바람도 제법 서늘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등대가 선명하게 빛나고있었다.

 

올해가 말라가항구 개항 150주년인지 이를 기념하는 로고가 빔프로젝터에서 나오고있었다.

지금은 이미 이마저도 지나간 과거가 되었겠구나... 

시간이 참 빠르다, 내가 말라가에 있던게 벌써 세 달이 더 지나 해도 넘어버렸다는게 말이다.

등대에 박힌 로고는 말라가 항구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말라가 시내의 야경

 

낮에 정박해있던 (범선인척하는) 배는 떠나고 말라가의 건물들이 대신 서서 빛을 발하고있었다.

그 배는 어디로 가고있었을까.

남부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