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듣다] Münchner Philharmoniker - Tugan Sokhiev

클래식이 되었건 뭐가 되었건간에 덕질을 하다보면 유난히 자기랑 인연이 없는 예술가들이 있다.
 
예를들어, 정말 보고싶던 고흐 작품을 보러 여행일정에 어떤 미술관을 기어이 끼워넣었는데
하필 딱 그 한 달동안 고흐 작품들이 미국 어느 미술관 특별전시에 임대를 나가서 없는 경우라던가
나에게 간간이 벌어지던 일은 예를들어 빈을 갈 일정이 나와서 공연 일정을 알아보면
딱 그 기간동안 빈필이 아시아 투어를 떠나 서울에 있다던가 하는 케이스가 그렇다.
 
이런 덕질이라는 행위도 무형의 경험에 대한 수집의 욕구, 강한 소유욕에서 발하기 때문에
여기에 공백이 발생한다는게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러시아 국적의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Tugan Sokhiev)'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당장 최근 2년 사이에만도 두 번이나 공연을 놓쳤다.
23년 빈필과의 내한공연때는 내가 정확히 서울공연이 있는 그 기간동안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었고,
당장 작년 여름(그러니깐 가장 최근에 겪었던 그 여름말이다) 서울시향과의 연주때는
이미 독일로 출국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 이전에도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프랑스에서도 한 번 놓친적이 있기에
조금 약오르는 지휘자같은 느낌이랄까... 

투간 소키예프(출처: 잘츠부르크축제 공홈)

 
순둥순둥 둥글둥글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이 형님(77년생)의 커리어는 아주 날카롭다.
일단 지휘 스승님 부터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의 거인이자
소비에트의 전설 '일리야 무신(Ilya Musin)' 인데다가

* 셈욘 비치코프, 테오도르 쿠렌치스 이런 짱짱한 아저씨들도 무신선생님 제자 라인업에 든다

서른 살이 채 안된 2005년에 프랑스 국립 툴루즈 카피톨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을 꿰차고
3년뒤에는 음악감독직까지 맡음으로써 존재감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이사이 몇 가지 커리어가 더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직책은 여기 툴르즈 음악감독직과 2014년부터 지속된 볼쇼이 음악감독직이다.
 
지금은 두 직위 모두 본인 스스로 내려놓은 상태인데,
다른 모든 러시아 국적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소키예프도 조국과 정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고
이 남자는 이러한 선택은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두 직위를 모두 던져버렸다.
 
이런 멋은 실력에서 나온다.
무신 계열 지휘자들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차분함과 관조적이면서도 치밀한 그의 음악은
세계 명문 오케스트라의 러브콜을 받기엔 충분해서
 
그가 주기적으로 함께하는 악단을 꼽아보자면
베를린필, BRSO, 뮌헨필, 빈필, 드레스덴 슈타츠, 베를린 슈타츠, 게반트하우스...
너무 화려해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리고 드디어 모처럼 이 사람의 음악을 들을 기회가 뮌헨에서 찾아와서
공연 일정과 내 스페인 여행 일정을 맞추느라 이리저리 날짜를 조정하면서 고생좀 했었다.

뿌-듯

 
어렵게 찾아온 기회인만큼 자리도 괜찮은 자리로 잘 잡아놓고 
공연장에 일찍 도착해서(흔한 일은 아니다 ㅎㅎ 보통 딱맞춰다님) 기대감을 좀 끌어올리고 있었다.

좀 치우쳐있긴 하지만 아주, 아주 훌륭한 아까운 자리

 
프로그램도 완벽한게 내 최애 작곡가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이다.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브8이 올라오는 날에는 다른 곡을 들을 여지가 거의 없다는것...
이 곡 하나만으로도 90분이 우습게 흘러가는 대작이기 때문이다.
 
24년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리카르도 무티 지휘로 같은 곡을 들었을때도 물론 그러했다.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은 이미 60대에 접어든 브루크너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곡이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에 작곡되었다.
 
완벽주의에다가 걱정이 지대하게 많았던 이 작곡가는 자신의 곡을 수없이 뜯어고치기로 유명하다.
그나마 이 작품의 초판본이 84년부터 87년이라는 '고작' 3년이라는 시간만에 나온건
1885년에 이루어진 7번 교향곡의 성공적인 뮌헨 초연에서 온 자신감이 큰 역할을 했을거다.
 
당시 7번의 뮌헨초연을 이끌었던 헤르만 레비(Hermann Levi)는
브루크너 음악을 가장 먼저 알아본 선구자인데,
브루크너도 이에 대한 인지가 확실했어서 그를 예술에 있어서 아버지로 칭하곤 했다.
 
그리고 1887년 8번 교향곡의 초안본을 레비한테 가장 먼저 조심스레 보내면서 의견을 요청했을때
아쉽게도 헤르만 레비는 8번 교향곡에 상당히 실망했다.
브루크너가 엄청나게 유리같은 멘탈을 가진걸 너무 잘 알고있던 레비는
브루크너의 제자인 피아니스트 요제프 샬크에게 편지를 했다.
 
"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자네 조언이 좀 필요하다네.
나는 당최 8번 교향곡을 어떻게 연주해야할지 감이 안잡히는데다가 그럴 용기조차 안난다네.
오케스트라나 청중이 당장 엄청 거부감을 보일것같은데 말일세."
 
결국 레비가 직접 전하지 못한 이 슬픈 소식은 샬크를 통해서 브루크너에게 전해졌는데
너무나 자명하게도 60대 노인은 크게 낙담했다.
몇 주동안 극심한 축 쳐져서는 그 어떤 위로조차 씨알도 안먹혔다고 전해진다 ㅠㅠ
 
브루크너는 레비로부터 혹평을 받은 바로 그해 8번 교향곡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2년 반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4번(이건 뭐 새로쓴 수준이지)과 3번 역시 손댄걸 감안해도
최소 1년 반 이상은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직도 내가 브루크너라는 작곡가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켄트 나가노 음반을 듣던 순간이 생각난다.

앨범 재킷에서부터 원전본임을 엄청 강조하고 있다

 
당시 라디오에서 정만섭 선생님이 들려주는 브루크너 7번(귄터반트)을 머리털나고 처음 듣고서는
큰 충격을 받은 산책자는 한창 브루크너의 음반을 여러 지휘자들의 연주로 닥치는대로 찾아들었는데,
어느날 8번 교향곡 음반을 틀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거랑 너무나도 다른 음악이 흘러나왔다.
 
...? 
 
내가 그 궁금증이 얼마나 컸는지 서점에서 책까지 사서 읽어봤을정도...
그때 알게되었다.
이 할아버지가 개복치중의 개복치라 툭하면 자기 음악에 칼을 댔다는걸...
 
나는 전반적으로는 개정판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차피 개정판이나 초판본이나 작곡가 본인이 쓴거라 '이게 진짜야' 라는 논쟁에 끼고싶지는 않다마는
일부 지휘자들은 이런 포인트에 좀 민감한 편이다.
(브루크너가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에 좀 많이 휘둘리긴 했다고 한다)
 
8번같은 경우는 곡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져버리기때문에
음반이나 공연 안내문에 몇년도 혹은 누구 편집자 버전인지 명시가 되어있지 않은걸 보게되는 순간
살짝 화가 뻗쳐버리는게 사실이지만 브루크너의 산실 뮌헨필은 그런걸 잊을 리가 없지.
 
오늘은 아주 일반적인 1890년 판본이다.
그나저나 결국 초연은 레비 선생이 아닌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1892년에 이루어졌는데,
무직페어아인(Musikverein)에서 열린 빈필하모닉과의 연주는 어마어마한 성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초연에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게도 딱 이 8번 교향곡만이 연주되었다.

정갈한 지휘를 선보인 투간...

 
식상한 얘기지만 연주는 역시나 좋았다.
훌륭한 오케스트라에 뛰어난 지휘자의 조합인데 아니 그럴수가 있나...
극적인 과장을 선호하지 않는 그의 지휘 스타일 덕분인지 약간 브루크너를 처음 접하던
귄터반트의 음반들로 돌아간 느낌마저 살짝 받았다.
 
그나저나 대체 이런 음악은 어떻게 작곡해내는거야... 
인간이라는 종은 정말 대단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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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정보
공연장 : Isarphilharmonie, HP8
 
Anton Bruckner
- Symphonie Nr.8 c-Moll, WAB 108 (1890 Fassung)
 
지휘 : Tugan Sokhiev
연주 : Münchner Philharmoni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