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듣다] Klavierkonzert : Grigory Sokolov

네 번째 공연이자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처음 듣는 독주회가 있던 날의 일기다.

물론 훌륭한 공연이었지만,

공연보다 공연을 보러 가기까지의 시간과 돌아오는 여정이

오히려 깊게 기억속에 각인된 하루다.

 

순탄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야기.

놀랄것도 없지만 '집 구하기'에서 모든게 시작한다.

 

잘츠부르크까지 먼 길을 가야하는 날이지만

그날따라 공을 좀만 더 들이면 손에 잡힐것같은 집 매물이 있었다.

독어로 이메일을 쓰다 보면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우는데도 두 시간가량이 걸리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마음속으로 뇌이다보니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숙소를 나왔을때는 기차 시간이 빠듯했다.

 

항상 이런 날은 트램도 지독하게 안오는 법이라

결국 트램을 내렸을때는 열차 출발까지 3분이 남았었다.

잘츠부르크행 열차 승강장 중앙역 남쪽에 훌쩍 빠져나와있어서

트램 정류장에서 뛰어도 대충 4~5분은 걸릴 거리다.

 

BRB RE5 노선은 뮌헨을 빠져나가기 전에 뮌헨 동(Ost)역에 딱 한 번 더 정차한다.

마침 구글맵을 켜보니 S-Bahn을 타면 예정된 열차 출발시간으로부터

단 1분 뒤에 동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나온다.

나는 DB의 상습적인 연착에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 잘츠부르크 가던 날에 이미 뮌헨을 빠져나가는 열차가 많다는 사유로 

중앙역에서 동역으로 가는데에 30분을 썼던 RE5였다(평소에는 8분)

운이 조금 좋으련지 DB 어플에서는 3분정도 연착이 있다고 나왔다.

 

S-Bahn 승강장에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다.

기가막히게 그 열차가 결편되었단다.

 

기차가 조금만 더 연착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U-Bahn 승강장으로 갔는데,

천만 다행이도 지하철은 바로 왔다!

 

내리자마자 토가 쏠릴만큼 열심히 뛴 산책자가 동역 8번 승강장에 올라갔을땐

진짜 너무 기쁘게도 아직 승강장 전광판에 RE5가 남아있었다!!!

 

야야 아직 안왔구나!

포기하지 않은 내 자신이 어찌다 대견하던지 자랑스럽게 인증샷을 남겼다.

모처럼 하늘에 찾아온 뭉게구름도 푸근해보였다.

다음 기차가 17:04 잘츠행이라고 알리는 전광판, 옆의 시계는 17:07을 가리킨다

 

5분여를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고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왔다.

그즈음 되니 전광판이 다음 기차로 넘어갔다.

 

아뿔싸, DB가 기차만 늦게오는게 아니라 전광판도 늦게 넘어가는구나!

 

오늘은 특히나 일찍 가야했던게,

어렵사리 취소표를 낚아채 예매한 티켓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매표소가 열려있는 시간까지는 가야 수령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 공연장은 1부 인터미션까지도 티켓 수령이 가능한데

유럽은 그렇지 않다.

매표소 직원들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어야 하기때문에

공연이 시작하는 순간 모두 셔터를 내리고 퇴근을 준비한다.

 

17:15, 내가 오늘 잘츠부르크게 가는게 의미가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

가더라도 티켓은 손에 만져보지도 못한채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허탕치려고 왕복 네 시간을 하는게 이성적일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가서 확인해보는게 후회가 덜남으려나?

세상은 내 마음과 달리 평온하기만 하다

 

결국 이 일기가 탄생한건 후자가 이겼기 때문이다.

내 속도 모르는 세상은 화창하기만 하고, 바람까지 솔솔 불어오는데

정말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은 

아무리 물을 들이부어도 달래지지가 않았다.

 

한 시간 뒤의 내 기차는 예정된 시간보다 25분 늦게 도착했고

(퇴근시간엔 정상이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한 시간 전 기차를 타려고 했었다)

공연장 옆 매표소 문앞까지 헐레벌떡 뛰어갔음에도

여덟 시를 4분여 넘긴 매표소는 철통같이 닫혀있었다.

 

똑똑. 노크를 했더니 짜증 가득한 얼굴로 나오는 젊은 남자 직원.

Closed means closed. Don't you understand?

(후... 또 짜증이 치미네)

 

독일어로 음절음절 힘줘서

"나 독일어 알아들으니깐 그렇게 함부로 영어로 지껄이지 마라.

미안하고 조~~은 저녁 보내길 간절히 바란다"

쏘아붙이고 바로 뒤돌아 나왔다.

(구어체에서는 '좋은 저녁' 까지만 말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또 바로 포기하고 돌아오기엔 좀 그래서... 

예매 확인 화면을 켜고 공연장 건물로 향했다.

그곳 매니저같은 사람이 잠겨있는 입구에서 나를 보고는 나와줬다.

 

내 사연(방금 옆에 매표소에서 한따까리 한 것까지)을 듣고서는

확신은 없지만 다른 티켓오피스가 하나 더 있으니 같이 가보자는 여자분.

가까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한 5분정도는 같이 걸어갔던것 같다.

미안한 마음에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쪽 티켓오피스도 이미 퇴근준비를 살살 시작한 참이었는데,

여자분이 잠깐 있어보라며 혼자 들어가시더니 잠깐 이야기를 하다 나왔다.

 

그 티켓, 바로 뽑아다 주겠다며 이름과 예매번호를 받아간 그 은인은

다시 건물로 함께 돌아오면서 DB을 믿지 말라고 농담하며 분위기도 풀어준다.

 

내가 수 없이 고맙다고 말해도 그게 자기 일이라고 손사레를 치던 그 분 덕분에

나는 중간에 입장해서 계단참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잘츠 공연장 스탭들 상당수가 이렇게 공연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와중에 오늘도 또 그게 부러웠다.

좋은 자리였던게 함정,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티켓이 많이 구겨졌다

 

그 직원분 아니었으면 사실 그대로 뮌헨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을텐데,

첫 한 곡만 흘려보내고 행복하게 감상을 시작했다.

소콜로프는 주목받는걸 선호하지 않아서 보통 무대도 어둡다. 천성이 차분하신 분

 

쇼팽은 뭔가 일반적인 템포보다 확연하게 느려서 

그렇게 편한 감상은 아니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슈만에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투명하고 또 따뜻한 슈만 숲의정경은 처음이었다.

이런 느낌의 곡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애시당초에 이 곡이 내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나는 이런 숲을 찾아다니고 있었던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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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공연이 모두 끝났다. 

이날 소콜로프씨가 여섯 곡의 앙코르를 선물해주셨다는데,

나는 사람들이 몰려나가기 전에 나를 도와주신 그 분께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싶었어서 앙코르가 있을것임을 알면서도 일찍 나왔다.

 

조금 둘러봐도 못찾겠어서 옆에 계시던 동료분께 물어보니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일찍 퇴근했단다.

내 인사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선 아쉬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왔다.

 

피차 뮌헨행 열차는 매 시 5분경에 출발해서 지금 가봐야 기차를 타지는 못하겠지만

힘든 하루였으니 잘츠 중앙역 SPAR에서 

사과주스라도 한 통 사마시는것도 오늘은 허락해줌직 하여 

바로 버스를 잡아타고 중앙역으로 향했다.

 

웬걸, 기차가 30분인가? 연착되어서 3분 뒤에 도착한다는 전광판의 안내

웃음이 나왔다. 

 

연착, 너가 나를 오늘 하루동안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ㅋㅋㅋ

기가막히게 나와 함께 잘츠 승강장에 도착하는 RE5

 

저 날은 운이 좋은 하루였을까

불운한 하루였을까

 

물론 둘 다에 해당이야 하겠지마는

감사할 사람이, 따뜻한 기억이 하나 생겼으니 좋은 하루라고 여기고 있다.

세상에 불행한 일이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행복은 내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그게 찾아왔을때 붙잡을 수 있는 법이다. 

 

아, 내 첫 소콜로프 실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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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정보

피아노 : Grigory Sokolov 

 

Johann Sebastian Bach 

 - Vier Duette BWV 802-805

 - Partita Nr. 2 c-Moll BWV 826

 

Frederic Chopin

 - Vier Mazurkas, op.30

 - Drei Mazurkas, op.50

 

Robert Schumann

 - Waldszenen, op.82

 

05.08.2024